이제 일상은 비탈길을 굴러 내려오는 수레와 같다. 속도를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충돌 없이 평지까지 도달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세우려 들면 그 순간에 뒤집어지고 만다. 삶은 그래서 요행의 연속이다. 운 좋게 성공해도 한순간에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세상은 무섭지 않는데, 나와 맞대면하는 것이 두렵다. 화려한 스펙도, 남이 선망하는 학력도 내 자신 앞에서는 안 통한다. 맛난 음식을 탐하는 사이, 혈관이 막히고 소화기관에 깊은 병이 들었다. 차를 타고 더 빨리 더 빨리 하는 동안 근육이 굳어 제 발로는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처방은 무엇인가? 오직 독서뿐! 책 읽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 책만 읽으면 될까? 된다. 어떻게? 그 대답은 옛 선인들이 이미 친절하게 다 말해 두었다. 왜 읽고, 어떻게 읽고, 무엇을 읽을까? 여기에는 안내자가 필요하다. 이 책은 허균, 이익, 양응수, 안정복,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홍석주, 홍길주 등 아홉 분 선인의 글 속에서 독서에 관한 글을 추려 내 옮긴이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모아 놓고 읽으니 반복되는 얘기가 있다. 소리 내서 읽는 낭독의 위력, 정독의 한 방편으로 권장되는 다독의 효과, 의심과 의문을 통해 확장되는 생산적 독서 훈련 등이 그것이다. 한결같이 강조하고, 예외 없이 중시했다.--- 「서문」
지식의 바다는 가없다. 드넓은 바다에서 마냥 허우적거리기만 해서는 노력해도 거둘 보람이 적다. 무작정 읽어 치우는 독서는 별 도움이 안 된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얻으려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옳다. 역사책에서는 치란흥망의 자취를 읽고, 경전에서는 성현의 마음자리를 본다. 실용서에서 얻을 것은 정보다. 경전을 실용서 읽듯 해서는 안 되고, 역사책을 경서 읽듯 할 것도 없다. 서로 얻어야 할 내용이 다르고, 목표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과 무작정 읽은 사람은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금세 구분된다. 문제 앞에서 허둥대며 수선만 떤다면 여태까지 그의 독서는 죽은 독서다. 상황 속에서 비로소 위력을 발휘해야 제대로 한 독서다.--- 「허균, 〈한 가지 뜻으로 한 책씩 읽어라〉」
독서란 비유컨대 집 구경과 같다. 만약 바깥에서 집을 보고 나서 ‘보았다’고 말한다면 알 길이 없다. 모름지기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하나 보아, 방은 몇 칸이나 되고, 창문은 몇 개인지 살펴야 한다. 한 차례 보고도 또 자꾸자꾸 보아서 통째로 기억나야 본 것이다.
讀書者譬如觀此屋. 若在外面見有此屋, 便謂見了, 卽無緣識得. 須是入去裏面, 逐一看過, 是幾多間架, 幾多窓?. 看了一遍, 又重重看過, 一齊記得, 方是. 「독서법」
집 구경은 겉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 속속들이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분명하게 안다. 교통도 봐야 하고, 위치와 규모도 살펴야 한다. 다른 집과 견줘도 본다. 비싸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싼 맛에 덜렁 살 수도 없다. 꼼꼼히 살펴 이거다 싶어야 사는 것이다. 책 읽기도 다를 게 없다. 이리 저리 뜯어보고 하나하나 따져 보아, 책을 덮고 나서도 성성하고 생생해야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었다 할 수가 있다.--- 「양응수, 〈독서와 집 구경〉」
섣불리 의욕만 넘쳐 덤벼들면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진다. 공부는 기본기가 중요하다.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삐딱하게 보아 문제의식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기가 없이는 망발을 하게 만다. 특히 선현의 말씀을 공부할 때는 더 낮추고 더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평상심으로 읽어야지 시비를 걸겠다는 마음으로 읽으면 심술이 삐뚤어진다. 덮어놓고 큰소리 치고 제 주장만 내세우려 들면 몹쓸 사람이 된다. 얕게 보는 것은 대충 보는 것이 아니다. 낮춰 보는 것은 우습게 보는 것과 다르다. 아무것도 아닌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거나, 그저 지나가는 말을 대단한 말로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공부에 호들갑이 심하면 사람이 경박해진다.--- 「안정복, 〈얕게 읽고 낮춰 보라〉」
책 속에는 글쓴이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것을 읽고 생각하는 것은 나다. 나와 글쓴이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의 큰 단절이 놓여 있다. 아전인수 격으로 내 멋대로 생각하면 자칫 엉뚱한 샛길로 빠져 길 잃고 헤맨다. 나와 너, 지금과 옛날 사이에 소통의 경로를 뚫어야 한다. 그는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이 말 속에는 어떤 감춰진 맥락이 있나? 궁극적으로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하나하나 눈금을 맞추고 눈높이를 조정하면 한 순간에 핀트가 딱 맞아 흐릿하던 사물에 초점이 딱 잡힌다. 기쁘고 좋다. 옛사람이 내 안으로 들어와 그와 내가 하나가 된 것이다. 푸닥거리 하던 무당이 접신의 경지에 들면 날이 시퍼런 작두 위를 펄펄 뛰면서 죽은 사람 목소리를 낸다.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책 읽기는 일종의 접신의 경지다. 말투나 흉내 내고, 시늉이나 하자고 들면 너 따로 나 따로의 외곬으로 빠진다. 너와 내가 만나고 지금과 옛날이 하나가 되어야 독서의 위력은 비로소 막강해진다.--- 「홍대용, 〈이의역지以意逆志 독서법〉」
마을의 꼬맹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읽기 싫어함을 야단치자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늘을 보면 파랗기만 한데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가 싫어요.” 이 아이의 총명함이 글자 만든 창힐蒼?을 기죽일 만합니다.
里中孺子爲授千字文, 呵其厭讀, 曰 :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兒聰明, ?煞蒼?. 「창애에게 답함〔答蒼厓〕」 3
『천자문』은 “하늘 천天, 따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으로 시작된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하늘은 저리 푸른데 어째서 검다고 하는가? 처음부터 억지소리를 하니까 아이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가슴으로 이해되지 않는 정보를 머리에 무조건 구겨 넣으려 드니 반발심도 생겼다. “읽기 싫어요, 선생님! 푸른 하늘은 파랗다고 말하게 해 주세요.” 여태 아무도 던지지 않았던 질문 앞에 훈장 선생님은 할 말을 잃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책은 마을 꼬맹이의 눈빛으로 읽어야 한다. 그저 따라 읽고 덩달아 외우는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의문이 성성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읽는 이의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강요된 지식 앞에 ‘싫어요! 아니요!’ 할 수 있어야 한다.--- 「박지원, 〈읽기 싫어요!〉」
젊어 한창 경전 공부에 몰두할 때는 『주역』 팔괘를 만들었다는 복희씨와 공자, 그리고 문하 제자 자로 같은 사람들이 꿈에 자주 출몰했다. 꿈속의 대화도 늘 공부 이야기뿐이었다. 생생하고 성성해서 한 마디 한 마디가 깨고 나도 생시처럼 또렷했다. 욕심이 터져 나와서 공부의 길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벼슬길에 올라 세속 잡사에 치이는 동안 내 꿈은 맑지가 않다. 성인을 꿈에 뵙기는커녕 늘 개꿈만 꾼다. 꿈은 생각의 그림자다. 성인께서 내 꿈에 다녀가신 지 50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발전한 것인가? 그 사이에 나는 성장한 것인가? 그때 성인께서 꿈에 들려주신 훈계. 게으름을 버려라, 성실해야 한다는 그 가르침이 여태 귀에 쟁쟁한데, 그때의 열정조차 잊은 지 오래다. 독서 속에서 찬연했던 50년 전의 꿈을 생각해 본다.
--- 「홍석주, 〈꿈에 만난 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