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슬퍼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가련한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 되어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아버지 하느님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께서 무책임한 사람들에 의해 강탈당한 수많은 젊은이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시길 바랍니다.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간호사, 의사, 자원봉사자, 소방수 등)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고통으로 얼룩진 이 도시를 흔들어 깨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권력가가 아닌 주님께 희망을 두기를, 그리고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결코 실험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진실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당신 손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길, 그리고 성모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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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손에는 밀알이나 가라지 씨를 뿌릴 가능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 얼마나 오묘한 일입니까! 우리가 선의 씨앗을 뿌리면, 그다음에 일어나게 될 일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씨앗을 뿌린 사람이 일어나건 자건, 낮이건 밤이건, 씨앗은 스스로 싹이 터서 자란다.” 선의 씨앗이 자라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다시 말해, 병자를 돌보고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일, 그리고 그밖에 이와 비슷한 행동을 더욱더 풍요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반면, 우리도 이미 아는 바와 같이, 가라지 씨를 뿌리는 자는 늘 분열시키는 말로 우리가 사는 지역과 가족, 그리고 일터를 일치하지 못하게 하고 불화와 미움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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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과연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까? 생명은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계속 그 생명을 동반해 주고 계십니다. 과연 여러분 역시 성모님처럼 생명을 잘 동반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떠십니까? 여러분의 장인, 장모님, 시부모님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그분들을 잘 동반해 주고 있습니까? 그분들을 걱정하고 계시기는 한 겁니까? 그분들을 방문하시나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건강상의 문제 또는 가정이 처한 상황으로 인해 종종 어르신들을 노인 요양원에 모시는 방법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노인 요양원에 머물 때, 여러분은 토요일이나 주일을 그분들과 함께 보낼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생명을 선사해 주었던, 그러나 이제는 사그라져 가고 있는 이 생명을 잘 돌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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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신 다음 음식을 축복하고 쪼개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음식을 주시며 군중들에게 나눠주도록 부탁하십니다. 이제 익명의 군중은 변화되어 인격화된 가족적인 공동체가 됐습니다. 이 공동체는 축복과 기적이 일어나는 공간입니다. 이 공동체에서 모두가 배불리 먹고 음식이 남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마태 14,20)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군중인 우리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간청하십니다. 빵에 맞추어 공동체를 만드십시오. 은퇴 요양원에서, 학교 식당에서, 임시 숙박소에서, 동네잔치에서, 노동조합에서, 카리타스 자선단체에서, 본당에서 그렇게 공동체를 만들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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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성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들과 함께 있는’ 본당 신부와 ‘결코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신부님, 저는 신부님이 늘 바쁘시다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라고 애덕의 차원에서 먼저 말하며) 본당 신부에 대해 말하며 이 점을 표현합니다. 복음적인 개방성은 건물로 들어오는 여러 장소에서 이루어집니다. 쇼핑이 끊이지 않는 지역에 위치한 성당에서 오랫동안 성당의 문을 닫아 걸 수는 없습니다. 경비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계속해서 고해소에 가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함에도, 성당에 찾아오는 신자들을 위해 문을 닫아선 안 됩니다. 과도한 소통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적절치 못한 전화라 할지라도, 자동 응답기에만 의존하고 무작정 그런 전화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소통의 문들은 외적이고 ‘매스컴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얼굴을 드러내는 또 다른 소통의 문으로 우리의 눈이자 우리의 미소이기도 합니다. 용기를 내어 조금은 걸음을 늦추고 우리가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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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 성찬례를 제정하는 모습 속에서 계약에 대한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이 계약을 살지 않은 사람에게 주님의 수난은 헛되며 십자가 위에 매달린 그분의 육신 또한 아무 소용없는 약탈품처럼 철저히 망가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찢기고 피 흘린 예수님은 그 몸을 영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살아 계십니다. 최후의 만찬에는 이미 부활의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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