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들은 서로 적대적인 권세들(powers), 즉 정치경제적 차원과 영적 차원의 서로 적대적인 권세들 사이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 권세투쟁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격렬하게 일어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폭력을 가하는 귀신들림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부정한 영들”(unclean spirits)이나 귀신들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왔다. 이런 영들을 쫓아내는 예수의 행위는 투쟁을 수반한다.
--- p.9~10
정치-종교적 갈등과 이스라엘의 갱신, 그리고 권세(들)이 복음서 안에서 그토록 두드러지고 또한 실제로 복음서의 중심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들에서도 이와 동일한 특징들을 발견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특히 복음서들이 그와 같은 탐구들을 위한 일차적인 자료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 중 어느 것도 예수에 대한 해석에서 거의 대두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많은 이유들이 있다. 현대 서구 문화의 세계관과 가정들에 뿌리를 두고 있는, 특히 신약성서 연구 분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유들 말이다.
--- p.11
로마는 또한 사명감을 들어, 오늘날 미국의 영토확장설과 유사한 예외주의(exceptionalism)와 보편주의(universalism)를 주장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타인이 겪는 재난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로마의 신앙과 정의, 제도들 안에서 구현된 역사로부터 최선의 것을 취하는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로마는 오늘날 미국처럼 자신들이 인류의 이상과 이익을 대표하는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모범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지위는 특별한 국제적 책임과 그 책임에 걸맞은 예외적인(특별한) 특권을 부여했다. 로마가 다른 민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장하기 위해 내세우는 명시적인 목적은 그들을 문명화한다는 사명감에 있었다.
--- p.44
성서학자들은 지금까지 마카비 반란을 촉발시킨 이런 갈등을 문화의 갈등, 즉 “유대교”와 “헬레니즘” 사이의 “문명의 충돌”로 해석했다. 이런 해석은 21세기 초 “서구사회와 이슬람”의 갈등을 “문명의 충돌”로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이 둘 모두의 해석은 ‘사상이 역사를 이끈다’는 현대 서구사회의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고, 동시에 문화 비평가들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규정하는 이데올로기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 기독교 성서학이 “유대교”를 편협하며 지나치게 정치적인 종교로 구성한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었다. 서구의 신학적 해석자들은 기독교를 고대 “헬레니즘”의 보편주의를 취하고, 그래서 민족중심적이며 율법적인 유대교와 분리되어 나아간 순전히 영적이며 보편적인 종교로 보았다.
--- p.100~101
그러나 예수가 이끈 운동과 다른 대중적인 예언 운동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 혹은 엘리야)에 대한 대중적인 기억에 의존한다는 점은 둘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다른 예언자들은 추종자들을 그들이 살고 있는 촌락에서 이끌어내어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 행위가 일어날 장소로 여겨지는 광야나 감람산으로 데리고 간 반면, 예수는 촌락공동체와 그들의 관심사들에 선교의 초점을 맞추었다.
--- p.146
민중들의 관심의 초점은 식민지배 수단들이 아니라 영들이 위협하는 세상에 맞추어졌다. 제국 지배의 구체적 권력들이 아니라 귀신들의 권세가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귀신들에 대한 믿음은 정복당한 지역 민중들이 식민통치자들과 직접적 충돌을 피하도록 해주는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였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또한 권력자들이 식민지배 상황에서 사회를 통제하고 구체적인 식민지배 상황을 숨기는 신비화 작업을 하는 데 효과적인 수단들이었다.
--- p.186
요세푸스에 따르면, 성전의 제단 자체는 엄청나게 큰 한 개의 네모 난 돌로, 높이는 8미터, 폭과 길이는 각각 25미터 크기였다(『유대전쟁사』5 § 225. 그러나 미슈나 Middot 3:1에 따르면, 그보다는 약간 작았다). 특별한 절기들마다 성전에는 매일 수천 마리의 동물들이 바쳐졌기 때문에, 도살하는 작업만이 아니라 제단 위에서 그 고기들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부어가며 큰 갈고리들로 뒤집어가면서 불에 살라 바치는 일은 항상 제사장들의 특권이었지만, 뜨거운 열기와 연기 속에 작업하는 일은 매우 힘든 노동이었다. 황소 한 마디를 도살해서 제물로 바치는 작업에만 제사장 24명이 필요했다(미슈나, Yoma 2:7). 이처럼 고기가 익는 냄새와 기름이 튀는 소리를 토라는 “reach nichoach”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야웨의 콧구멍을 넓히기 위한 “기쁨의 향기(the aroma of pleasure)”이다.
--- p.234
그러나 예수 시대에 갈릴리는 더 이상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관할 아래 있지 않았다. 로마는 헤롯 안티파스를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갈릴리 촌락민들은 그의 통치에 분노할 만한 이유 역시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통치 전반기 20년 동안 갈릴리 촌락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건설한 두 개의 새로운 도시는 헤롯의 세금 징수 효과를 증대시켰고 그로 인해 갈릴리인들에게 지워진 짐은 가중되었다. 그래서 만약 예수가 갈릴리 통치자들과 대결하고자 했다면, 그는 티베리야나 세포리스로 갔어야 했다. 또 만약 그가 갈릴리에서 붙잡혀 처형되었다면, 아마도 그는 세례 요한처럼 십자가형이 아니라 목이 잘려 죽었을 것이다.
--- p.246
따라서 이런 방해 행위는 최소한 복음서들이 묘사한 것처럼 강압적이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예수가 공격했던 일들은 “부패한” 행위들이 아니라, 희생 제사를 위해 필요한 성전의 일반적인 상거래 행위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가 행한 일은 결과적으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지극히 거룩한 제도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또 성전은 (갈릴리와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어느 정도 확대된) 유다 지방 정치경제의 중심 제도이자 사제귀족 권력의 토대였음은 물론 로마 제국의 통치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행위는 로마 제국 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에 해당되었다. 성전에서 작동되고 있는 일들을 강압적으로 방해한 그의 행위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돌이킬 수 없는 행위였던 것이다.
--- p.268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비판적인 학자들은 예수가 묵시적 환상가(an apocalyptic visionary)이거나 지혜 교사(a wisdom teacher)였다는 두 개의 거의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환상가나 방랑하는 교사 둘 중 어느 쪽이든, 그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정도로 로마 제국 질서에 위협을 주기에 충분한 일을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가 십자가형 처형을 당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여전히 예수가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한) “메시야”라고 주장했거나 혹은 추종자들이 그렇게 선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4?50년 동안 자료들을 통해 수행한 역사적 연구와 비판적 고찰은 이런 과거의 입장이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a) 유대인의 표준적인 “메시야” 기대에 대한 근거가 거의 없다. (b)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장 초기의 자료들은 그의 사역 동안이나 혹은 사역의 절정인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선포하거나 혹은 선포되었다고 진술하지 않는다.
--- p.291~292
예수의 선교는 이스라엘 민중들이 지닌 열망의 성취, 즉 하나님이 다시금 자신들을 구원하여 자신들의 존엄한 삶을 회복해 주리라는 확신에 뿌리내린 민중들 가운데 집단적인 힘을 발생시켰다. 예수의 선교에 대한 반응으로 형성된 예수운동들은 이처럼 그들의 계약공동체들에게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받는 대안 사회로 다시 활력을 얻게 만드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들은 예수가 통치자들과 공개적으로 대결하고 로마인들의 손에 순교를 당한 일로 인해 더욱 담대해졌다. 민중들 가운데 생겨난 협동적인 힘은 그들로 하여금 여전히 자신들의 삶의 조건들을 결정하는 권세들에게 저항하는 운동을 확장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권세들이 주기적으로 행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p.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