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연립 203호 경미네 집에, 중앙교회에서 목사님과 사모님과 또 한 분 집사님이 심방을 오셨다. 그분들이 가신 후 차 한잔 마시자며 몇몇이 경미네 집으로 올라갔다. 대화 내용이 자연스레 신앙으로 모여졌다. “성경 말씀이 그렇게 훌륭하면 집에서 보면 되지. 저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는 꼴 난 보기 싫더라.” 나는 정말로 꼴 보기가 싫어서 이렇게 한마디했다. 지금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다. 거기다가 나는 한술 더 떴다. “야, 점쟁이한테 가서 물어봐. 얼마나 잘 맞히는지 속이 다 후련해져.” 내게도 이런 모습으로 살았던 때가 있었다. 부끄럽다.
경미 엄마는 그러는 내 앞에서 펴보지도 않은 것 같은 새 책 하나를 들더니 왔다갔다했다. 그런데 뱉은 말과 달리 나는 그 책이 궁금해졌다. “그게 무슨 책이야?” “아, 조용기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 보고 싶으면 갖다 보세요.” 나보다 나이가 어린 경미 엄마가 조심스레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까칠한 말만 하던 내가 그 책에 관심을 보이니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을까. 그런데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왜 그렇게 그 책이 보고 싶던지. 나는 자존심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그 책을 빌려서 내려왔다. 조용기 목사님의 간증 책 『주여 뜻대로 이루소서』였다. 밤새도록 다 읽었는데, 책장을 덮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당장이라도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가보고 싶었다. 난 그때까지 여의도에 순복음교회가 있는지도 몰랐고, 조용기 목사님이란 분의 성함도 처음 알게 되었다. 더욱이 책 내용 중 폐병 3기의 몸을 치료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위력에 압도당했다. 난 마귀가 쳐놓은 철통같은 벽 속에 갇힌 채 복음의 소식도 듣지 못하는 눈먼 세월을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신부로 단장하라」중에서
6개월쯤 다녔을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보며 실망이 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완악한 모습으로 내게 피해를 주었다. ‘저렇게 밖에 못 사나. 예수는 믿어서 뭐해.’ 나는 다시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거의 일 년을 쉬는 동안 구역장을 맡기 전의 생활로 돌아갔다. 잘못된 판단으로 마귀에게 빌미를 주자 깨끗이 청소된 내 안에 일곱 귀신이 무섭게 점령해 들어왔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100일 탈상을 할 때 들어온 부조금이 이백만 원은 족히 넘었다. 당시 내 형편엔 큰돈이었지만, 남편을 설득해서 그 돈으로 인천 송도에 있는 굿당에 가서 밤새도록 굿을 했다. 친정엄마와 함께 갔는데, 어리석은 나는 끝나고 오면서도 쏟아져 들어올 축복을 기대하며 뿌듯해했다. 나를 다시 마귀에게 뺏기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통탄을 하셨을까. 사탄이 내 영혼을 죄의 소굴로 다시 물어가려고 노력하자 난 또 걸려든 것이었다. 교회에서 심방을 오겠다고 전화가 오면 시간이 없다거나 외출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피해 다녔다. 이렇게 마귀가 하는 일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뿐이었다.
고통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울고 있을 때였다. 연락도 없이 최 권사님과 몇몇 집사님이 심방을 오셨다. 그러더니 나를 시험에 들게 한 집사님들 때문에 교회에 오지 않는 건 안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과 수직으로 일대일의 관계를 유지하며 믿음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기적과도 같이 그 한 말씀에 영혼이 깨어나서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일을 지키고 있다. 피하고 뺀질거렸던 지난날의 나였기에, 전도하다가 나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 상황과 심정이 얼마든지 이해가 된다.
---「옳고 그름의 함정에 빠져」중에서
처음 교회에 출석한 날이 알고 싶어서 얼마 전 반신반의하며 여의도 순복음교회 교적부에 전화를 했다. 1986년 4월 25일이라고 한다. 이날은 교적부에 올린 날이고, 4월 6일 내가 처음 교회에 갔을 때는 성찬식을 드린 첫 주였다. 34년 전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 교적은 김포로 내려왔다. 성도 수가 많지 않았던 때라 그때는 김포 성전이 없었고, 아동성전만 있었다. 연락이 와서 갔더니 그곳에 생각지도 않았던 둘째 시누님이 계신 것이 아닌가. 우리는 보자마자 서로가 깜짝 놀랐다.
과거에 형님은 하성에 사시면서 그곳에 있는 순복음교회에 다니셨다. 그런데 읍내로 이사 오면서 교회를 옮기신 덕에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이단이라고 하고, 하도 극성맞게 예수 믿는 것을 보고 이단에 빠졌다며 한심해했었다. 시누님은 우리 집에 오실 때면 순복음 소식지를 꼭 갖고 오셨다. 나는 재수가 없다며 단 한 자도 보지 않고, 형님이 가시고 나면 쓰레기통에 신경질적으로 쑤셔넣기 일쑤였다. 우리 집에 들를 때마다 형님은 형편이 자꾸만 기울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늘 안타까워하셨다. “자네는 꼭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이 복된 말이 그때는 왜 그리도 어리석게 들렸는지 모른다.
---「옳고 그름의 함정에 빠져」중에서
한번은 장곡이란 곳에 배달을 하고 오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렸다. 헬멧 앞 보호창에 눈송이가 붙어서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냥 감작에 의지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오토바이도 익숙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넘어지지도 않고 달릴 수 있었는지, 그날을 기억하면 성령님이 도우신 것이라 확신한다. 오토바이에 익숙해지자 이제는 오히려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 앞서 몸을 사리게 된다. 눈길에 힘들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지, 지금도 가장 싫은 것이 눈 오는 날이다. 설경을 감상할 마음도 생기지 않을 정도다.
지국을 한다고 했을 때 남편은 속으로, 나는 지국장이니까 책상 앞에서 앉아만 있는 줄 알고 어느 정도 묵인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배달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아가면서 반대가 더 심해졌다. 주일은 쉬지만 매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나에게도 큰 것이었다. 먼 곳으로 여행 가는 것은 아예 꿈도 못 꾸었다. 기도원에 가고 싶어도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내가 배달을 안 하면 적자가 되니 일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힘들 때마다 혼자 하는 말이 있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김포에서는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없어서 믿고 이 일을 시키신 거야. 급하게 예수님 믿게 하시고 문서 선교로 예수님 믿도록 하신 것도 다 이유가 있으신 거지. 어찌 되었든 날 믿고 계신 거야. 그러니 난 대단한 존재란 거네.”
---「오토바이 타는 여자」중에서
나이 사십이 다 된 여자가 길을 헤매며 그 험한 일을 실속 없이 하고 다닌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남편에게 한마디씩 하는 모양이었다. 더욱이 신문 배달은 고학생이나 통념상 가난을 해결하기 힘든 사람들이 많이 하는 직업이었으니 남편의 자존심이 얼마나 무너졌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많던 재산을 허무하게 다 날리다 보니 우리 집 형편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그런데 급기야는 안사람인 나에게 신문 배달까지 시켜 생활하게 됐다고 생각을 하니, 남편은 그것을 가장 못 견뎌 했다.
남편의 그 속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나 역시 남의 눈을 의식할 때 창피한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창피한 마음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면, 어떤 것이든 국민일보보다 우선이 되지 못했다. 가끔 신문이 안 들어왔다는 전화를 남편이 받을 때가 있었다. “안 들어가면 보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남편은 소중한 한 명의 구독자를 끊도록 해서 내게 복수를 했다. 그나마 둘째 아들 성조가 내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남편의 사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