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들은 철학에 대한 원칙적인 거부와 작품 안에 나타나는 철학의 편재성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거부(철학에 대한 거부)는 원칙적으로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모순이 아니라, 고대 철학을 점진적으로 극복하려는, 다시 말해서 고대 철학을 완성하려는 그리스도교의 요청이다. 이 점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철학의 고유한 대상, 곧 ‘내적 인간’ 또는 근대적으로 말하자면 ‘주체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유효하다.
내적 인간의 발견은 발견이라는 측면에서 부흥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 시대에 페트라르카와 마르실리우스 피치누스는 고대의 유산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도교 유산도 이용했다. 종교 개혁과 반종교개혁의 시대였던 근세 초기는 교부들의 사상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독일에서 내적 인간에 대한 플라톤적 개념이 이미 아주 이른 시기에 ‘내면성’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해되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피히테와 특히 헤겔과 같은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도 옛 주제가 얼마나 현재적이었는가 하는 것이 분명해진다.
---「입문」중에서
칼 라너, 발타사르와 같은 현대의 위대한 신학자들도 교부들과 같은 생각으로 철학적인 개념을 사용해서 그리스도교 사상을 전개시켰다. 왜냐하면 교부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신학의 내용은 필수적으로 철학의 개념과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철학을 통해서만 비로소 신학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제」중에서
일반적으로 교부들은 사도 시대 이후 8세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저술가들을 일컫는 용어로서, 시기적으로 고대 시대(antiquitas)에 살았고, 정통적인 교의(doctrina orthodoxa)를 주장했으며, 거룩한 삶(sanctitas vitae)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교회로부터 인정(approbatio Eclesiae)받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시대적으로 사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활동했던 학자들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해제」중에서
20세기에 들어와 ‘그리스도교 철학’의 이념과 개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을 통해 확립된 것은 사실 이미 19세기에 신중하게 준비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 안의 철학’을 수립하기 위해 엄청난 시도를 감행한 피히테, 쉘링, 헤겔에게서 이것이 구체화되었다는 것에 누가 이론을 제기하겠는가! 이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철학을 수립하는 것을 철학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리스도교 철학(christliche Philosophie)과 그리스도교 안의 철학(Philosophie des Christentums)을 구분했다.
---「입문」중에서
철학을 익히 알고 있는 논리학, 윤리학, 자연학으로 세분화시킨 것은 플라톤으로부터 유래한다. …… 이와 같이 철학을 구분하는 것을 그리스도교 철학의 원전인 구약과 신약 성경 자체에 적용했다. 여기서는 성경 말씀의 학문 이론적 지위에 대해서, 그러니까 성경이 제1원리들의 지위를 차지하는지, 또는 어떤 다른 학문적 지위를 지니는지 하는 물음을 포괄적인 의미로 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이 교부들에게 있어서 철학의 최고 형태를 명시한다는 점은 그리스 철학의 세분화가 성경 자체에서 재인식될 수 있다는 점으로 귀결된다. 우리에게는 성서적인 것과 그리스적인 것, 성경과 철학이라는 두 가지 사안으로 보이는 것이 교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였다. 양자 사이의 대립은 오늘날 신학자들 자신이 말하듯이, 신학자들이 생각해 낸 것이었다.
---「성경도 철학이며, 부분영역에서 세분된다」중에서
내적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논의의 근간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이다. 이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외적’ 인간에서 벗어나 매일매일 ‘내적’ 인간으로 새롭게 완성되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로마서』에서도 내적 인간의 법을 정신의 법으로 논의하고 있다.
---「세 분야의 통합적 지향점으로서 내적 인간」중에서
내적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신플라톤주의적 형이상학의 영향사를 가장 중요한 국면에 따라 추적하려고 한다면, 하이데거가 자신의 ‘존재의 형이상학’을 공공연히 이러한 전통에 대한 관점에서 계획했다는 점도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이 담고 있는 것으로서, 염려, 염려하는 신중함, 현존재의 일상성, 현존재의 실존적인 양상들, 소문, 호기심, 애매함이 나타내는 현상들은 고대 후기와 중세의 실천적 형이상학의 전통에 대한 관련성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정신적인 봄(에폽티): 내적 인간의 형이상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