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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로 이름쓰기

엉덩이로 이름쓰기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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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17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16쪽 | 226g | 130*195*12mm
ISBN13 9788993342994
ISBN10 8993342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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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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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룩한 눈

고백하건데
나는 쓸모없는 존재다

대상을 보는 시력은 있으나
현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은 없다

사람을 알아보고 인사할 수는 있으나
그 인연이 맺어진 이유는 볼 수 없다

상대 얼굴을 보고 나이를 가늠할 수는 있으나
세월 속 경험으로부터 온 내공은 볼 수 없다

사물의 용도를 식별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탄생시킨 숱한 노고는 볼 수 없다

펼쳐진 산과 강의 풍경에 감탄할 수는 있으나
그 속에 연결된 자연의 섭리는 볼 수 없다

일출과 일몰의 경관을 만끽할 수는 있으나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은 볼 수 없다

발전하는 과학 기술에 감탄할 수는 있으나
인류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볼 수 없다

하늘, 별, 달, 구름을 바라볼 수는 있으나
온 만물을 다스리는 신은 볼 수 없다

고백하건데
나는 쓸모없는 존재다
--- p.17

나비를 품은 입술

1

양 입술 날개를 퍼덕인다
음성을 싣는 쉼없는 자유비행이다

날개를 터는 데 온정신이 팔린다
그 소리짓으로 생길 파동도 모른 채

이따금 침묵의 애벌레 시절이 그립다
묵묵히 때를 기다린 차분함의 통찰이 허락된

양 입술을 털어 생긴 나비 효과를 본다
뿌듯함이 밀려올 때도 자책감이 파고들 때도

요란한 날갯짓에 비로소 해방되고자 한다
다가올 파동을 감지할 직관적 비상을 꿈꾼다

2

고고한 관능미는 나방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도도한 입꼬리는 곧추세운 날개의 기품같고
윗입술 큐피트의 활 모양새는 에로스의 정점이다

날개의 형형색색 자태로 짝을 찾는 나비처럼
모세혈관의 붉은 뜨거움으로 상대를 부른다
스치듯 만났다 떨어지며 서로를 애무한다

한 쌍이 만나 밀월여행을 떠나는 나비처럼
말이 필요 없는 두 사람만의 현란한 춤이다
파고드는 촉감과 떨림으로 미묘히 교미한다
--- p.21

과거를 담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은 뿌리를 두고 있다
쉽게 자를 수 없는 연緣이다

젊은 날의 풍성한 숱한 인연이
우리 삶 속에 그렇게 심어져 있다

모낭에서 발모와 탈모를 반복하듯
삶 속에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한다

죽은 세포들로 길게 연결된 털이
윤기를 내며 생동감을 발휘하듯

과거가 된 인연들과의 추억이
그대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미련없이 빠지는 머리카락처럼
자취없이 스쳐가는 인연들

세월이 흘러 쉬 느껴지는 휑함
본래 머리카락은 무명초다
--- p.40

뇌의 푸념

분명 내가 듣기로는,
독불장군처럼 도도하게 명령만 내리면
각 기관들이 곧바로 복종하는 체제 아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정상의 자리라 했는데

실제 내가 있어보니,
독자적 의사결정은 도저히 불가하고
세포들이 달려들어 온갖 요구를 하니
모든 민원을 접수 처리하는 자리다

눈은 쉴 새 없이 내게 인지를 강요하고
귀는 질세라 내게 지식을 주입하며
입은 거창하게 상대를 제압해달라 하고
심장은 따뜻함이 없다 질책하고
근육들은 여유가 없다 야유한다

그래도 그런대로 끌고가나 싶으면
불연 예견없이 찾아오는 허무감은
어떤 성취감으로도 떼어 낼 수 없다

답은 없고 선택만이 있는 이 미지의 세계에
나를 조정하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 p.42

척추의 연설

여전히 생생합니다
마침내 허리를 곧추 세워 산을 바라 본 그 날을

과히 혁명이었습니다
감히 땅에 맞서 직립 보행을 시도한 첫 걸음은

한 발을 떼고 재빨리 다른 발을 내딛자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온 신경 세포가 긴밀히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오롯이 걷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어느덧 직립보행의 유전자가 결성됐습니다
마치 본래 두 발로 걸어다닌 존재처럼

두 발로 성큼성큼 걷는 그대여
수 억년의 세월이 잉태한 위대한 존재다

손으로 자유롭게 도구를 사용한 그대여
수 억 개의 유전자에 각인된 강인한 승리자다

사고하는 큰 두뇌를 지닌 그대여
온 세포마다가 전율을 느끼는 온전한 생명체다

그대는 시간이 잉태한 귀한 결과물이다
그대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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