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사람이 등장한다. 6:2에서 그는 면류관을 쓴 “정복자”로 나타난다. “내가 보니, 보라,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 그 위에 탄 자가 활을 가졌더라. 그에게 한 면류관이 주어졌고, 그는 나가서 정복하고 정복하려 하더라”(계 6:2). 성경에서 정복자로 나타나는 인물은 2인자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인물이 아니다. 느부캇넷살, 파라오, 코레스, 다리오, 카이사 등의 정복자들은 항상 당대에 가장 위대한 왕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인데, 요한계시록 6:2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그 정복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그에 대해서 “정복하고 정복하려 하더라.”라고 말한 것을 보아 그는 매우 대단한 인물일 것이다. 마치 유명한 영화의 “스타”처럼 그는 사람들의 눈에 탁월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다루었듯이 학자들의 어떠한 방해도 신경 쓰지 말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믿자. 성경의 최종적인 해석자는 저자이신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분의 해석 방법은 성경 구절을 성경 구절로 비교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떠한 전통이나 해석 체계, 심지어 “헬라어 원본”을 참조하기에 앞서, 또 어떠한 학자나 주석가의 해석을 보기에 앞서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자.
“보라, 흰 말 한 마리가 있는데”(계 6:2). 우리는 같은 책에서 또 한 마리의 “흰 말”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 19:11이다. 거기에는 흰 말과 더불어 그 말을 탄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고, 의로 심판하시며(계 19:11),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린다(계 19:13, 요 1:1-3). 또한 그분의 이름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 불리며(계 19:16), 그의 뒤를 따르는 하늘의 군대는 “성도들의 의”로 옷 입는다(계 19:8,14). 이분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이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록된 대로 명백하다. 요한계시록 19장의 말 탄 분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계시록 6:2에 등장하는 흰 말 탄 자다.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 볼 때, 6장과 19장에서 둘 다 흰 말이 등장하고 그 위에 탄 사람들이 둘 다 “정복자”라는 것을 보아 같은 인물일 것이라고 우리는 잠시 착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다.
요한계시록 19장의 말 탄 자는 많은 왕관을 썼지만(19:12), 6장의 말 탄 자는 하나의 면류관만을 썼다(6:2). 요한계시록 19장의 말 탄 자는 칼을 가졌고 활은 갖고 있지 않지만(19:15), 6장의 말 탄 자는 칼대신 활을 갖고 있다(6:2). 요한계시록 19장의 말 탄 자의 뒤에는 하늘의 군대들과(19:14) 천 년의 평화가 뒤따르지만(20:1-6), 6장의 말 탄 자의 뒤에는 전쟁과 기근과 사망과 지옥이 뒤따른다(6:3-8).
결론적으로 말해 말 탄 두 사람은 같은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의 해석”과는 반대로 교단이나 교회의 전통에 따라 해석한다든지, 어떤 학자의 해석을 의지한다든지, 비유적, 묵시적으로만 해석한다면, 흰 말 탄 자에 대해 이와 같은 명쾌한 답변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항상 성경보다 학자들이나 교단의 교리에 의존한다. 이때 더 많이 공부한 학자나 더 교세가 센 교단의 해석이 우위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직 성경을 성경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면, “우둔한 직역주의자”라든지 “성경광신자”라든지 하는 비난을 받게 된다.
“면류관이나 왕관들,” “활이나 칼,” 이러한 것들이 무엇이 문제인가? 결국 모든 것들은 상징이 아닌가? 요한계시록은 고도로 비유적이고 묵시적인 표현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독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두 “누룩을 퍼뜨린 여인”(마 13:33)이 퍼뜨린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요한계시록을 결코 “고도로 비유적인” 책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석하는 이상 결코 요한계시록 6장의 흰 말이나 17,18장의 여인의 정체는 파악될 길이 없다.
어떤 성경들은 관주를 붙일 때 요한계시록 6:2에다가 19:11과 같은 관주를 붙인다. 성경에다 이렇게 관주를 붙임으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이 둘이 같은 존재라고 인식하게 된다. 6장의 흰 말 탄 자를 19장의 흰 말 탄 자와 동일하게 해석할 때 이것은 “복음의 점진적인 확산”을 의미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후천년주의, 또는 무천년주의 해석 체계로 발전하게 된다. 사탄은 자기의 정체를 가리고 진리를 가려버리기 위해 성경에 잘못된 관주를 넣게 하거나, 심지어 성경을 변개시키면서까지 잘못된 해석을 하게 만드는 교묘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말 탄 자는 너무 비슷하다. 바로 이것이 지난 1,500년 이상 사탄이 사람들을 속여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믿게 만든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사품”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완벽한 모조품”이다. 사탄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와 닮았는지 로마카톨릭은 고사하고 성공회, 그리스정교회, 루터교, 감리교, 장로교 등 기독교의 주요 교단에 속한 학자들과 지도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취급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그는 지난 1,500년 동안 사람들에게 자신을 주님으로 속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의 차이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너무도 닮은 인물, 그래서 우리는 그를 “신비의 미스터 X”라고 부른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인물은 모세도 엘리야도 바울도 다윗도 요셉도 아닌, 바로 사탄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여러 모로 닮았다.
1.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다(계 19:16). 사탄은 “모든 교만한 자손의 왕”이다(욥 41:34).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천사”이다(갈 4:14). 사탄은 “빛의 천사”로 나타난다(고후 11:11-14).
3.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분 안에는 어둠이 없다(요일 1:5). 사탄은 “빛의 천사”로 나타난다(고후 11:11-14).
4. 예수님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다(딤전 3:16). 사탄도 이 세상의 “신”이다(고후 4:4).
5. 예수 그리스도는 “신부”인 도성을 갖고 있다(계 21:9). 사탄도 “신부”인 도성이 있다(계 17:1-9).
6. 예수님은 성경으로 논쟁하신다(눅 4:1-10). 사탄도 성경으로 논쟁한다(눅 4:10).
7. 예수 그리스도는 42개월을 사역하셨다(눅 3:23, 요 2:13; 5:1; 6:4; 12:1). “짐승”도 42개월을 활동할 것이다(계 13:5).
8. 그리스도는 “기름부음받은 자”(크리스토스, 메시아)라는 말이다(행 4:26, 시 2:2).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사탄도 “그리스도”라 불린다. 그도 기름부음을 받았다(겔 28:14, 마 24:5). 그는 “적그리스도”라 불린다.
9. 하나님은 경배를 원하신다(요 4:23-26). 사탄도 경배를 원한다(마 4:8-10).
많은 사람들은 사탄이 여관이나 술집, 당구장, 도박장, 나이트클럽 등에서만 활동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사탄은 기본적으로 종교적이다. 그는 이 세상의 “신”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속여 온 방법 중에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인 것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고, 방탕하고 음란한 것은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종교를 관장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성경적인 기독교 이외에도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신”은 그 종교들 안에서 역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신”이 누구냐가 문제이다. 아무리 종교적이고, 거룩해 보이고, 경건해 보일지라도 그 “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다. 그는 “이 세상의 신”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종교계를 지배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이방 종교뿐 아니라 기독교도 관장해 왔다. 기독교 안에서 그의 영역은 비성경적인 모든 것, 즉 종교회의들, 교리문답, 미사나 성사, 의식들, 각종 기도모임과 초교파 운동, 교회일치운동 등이다. 이 모든 것들은 사탄이 자신을 하나님같이 보이도록 만들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이러한 예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독보리의 비유”에서 잘 나타난다(마 13:24-30,36-42). 그 비유에서, 사람들이 자는 사이에 악한 자가 곡식밭에 독보리를 뿌리고 갔다. 그리고 주인은 독보리가 자랄 때까지는 곡식과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추수 때까지 자라게 두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악한 자의 자녀들이 기독교계에 뿌리 뽑혀지지 않은 채 무수히 자라고 있는 것이다. 변개된 성경들에는 “독보리”를 “가라지”로 바꾸어 번역했다(『개역한글판성경』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가라지는 열매가 맺히기 전에도 누구나 구별할 수 있기에 곡식을 상하게 하지 않고 뽑을 수 있다. 만일 사탄이 사용하는 사람들이 강도나 살인자나 술주정뱅이 같은 사람들만이라면, 누구라도 사탄의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탄은 가장 종교적이므로 교회나 성당에서, 가장 거룩하게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일꾼을 키운다. 사탄의 음모와 그 세력들은 마지막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기에 많은 사람들이 속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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