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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시대를 읽다

정도전의 시대를 읽다

: 격변기의 혁명과 개혁 그리고 진보와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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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504쪽 | 716g | 153*217*35mm
ISBN13 9788978894388
ISBN10 8978894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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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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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엽의 고려 사회는 권력이 사유화되었고, 민생이 사라졌으며, 학문과 종교는 이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상실했다. 뿐만 아니라 중원을 장악한 원나라의 지배력 강화로 자주성을 상실했으며, 개혁의 실패와 전쟁이 반복되었다. 정도전은 이러한 시기에 고려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자신의 삶을 깊이 통찰하며 개혁에 대한 의지를 구체화해 나갔다. 역사상 세상을 바꾼 위인들은 많지만, 정도전처럼 정치·경제·국방·사상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변화와 혁명을 주도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삶은 60년을 넘지 못했지만, 600년이 지난 오늘날 그를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35

정도전은 부모상을 치르면서 『맹자』를 하루에 한 장 또는 반 장씩 정독할 정도로 집중했다. 특히 여기에는 “백성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와 군주는 백성의 뜻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며 혁명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담겨 있었다. 즉 무왕이 주왕을 처형한 사건에 대해 “주라는 사내를 죽였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며 “군왕이 포악하거나 무능하면 이미 군왕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백성이 군왕을 선택할 수 있다”는 혁명의 정당성을 제시했다. 이렇듯 『맹자』는 정도전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제공해주었다.
--- p.96

“바른말을 좋아하다가 귀양 왔지만, 목숨은 구했으니 나라에 고마워해야 하고, 지금부터라도 조심하면 화를 면하게 될 것이다”라며, 아무런 대책도 없이 권력에 저항했던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반성도 한다. 이제까지 선비를 자처하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의義를 위해 죽겠다’는 자신의 각오가 무색해질 정도다. 그런 점에서 유배지에서의 시간은 정도전이 진정한 선비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창 활동해야 할 나이인 30대를 넘기면서 시작된 유배와 피난 그리고 칩거 등 9년간의 낭인 생활은 정도전에게 더없는 현장 학습이었다. 달리 말하면 그는 거친 들판에서 단련되면서 사상적 토대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관계없이 고려의 상황은 좀처럼 회생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p.139~151

정도전은 경사經史·예학禮學·병법兵法·산학算學·천문 등도 탐구했고, 성리학을 철저하게 받드는 유학자이면서도 백성을 위한 것이라면 무속과 풍수지리 그리고 참설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정도전을 ‘인仁이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 즉 안민安民이며,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등 ‘정치의 발견자’로 평가받는 에도江戶시대 일본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徠, 1666~1728)와 비교하여 몇백 년 앞서 위민爲民을 실천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 p.203

이성계와 최영은 전쟁터에서는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입에 맞서 패배를 몰랐던 천하 명장이었고, 조정에서는 청렴한 관리로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점도 적지 않았다. 최영은 중앙의 귀족 출신이었고, 그의 군사력은 왕의 시위와 숙위를 담당하는 우달치(于達赤우달적 또는 우다치) 그리고 왕궁과 왕을 숙위하는 성중애마成衆愛馬 등 중앙의 정부군이 기반이었다. 그는 권신 이인임과도 가까이 지냈다. 최영은 문인들에 대해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소비한다”며 좋지 않은 감정을 지녔고, 개혁 성향의 신흥사대부에 대해서도 “불평불만으로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 p.212

정도전은 이색에 대해 첫째, 왕씨가 아닌 우왕과 창왕의 옹립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왕실의 존엄성을 파괴했고, 둘째,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창왕과 모사를 꾸며 국정을 혼란하게 했으며, 셋째, 왕의 스승으로 우왕의 포악한 행동을 말리지 않았고, 넷째, 전제 개혁을 완고하게 반대했으며, 다섯째, 유학자의 신분으로 불교를 숭상했다는 등 그동안 급진파가 개혁에 나서면서 비판했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비판했다. 다시 말해 이색에 대한 비판은 우왕과 창왕 대의 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 p.293

온건 보수파는 공양왕의 지원에 힘입어 정몽주를 중심으로 하여 일시적으로 뭉칠 수는 있었지만, 공양왕의 지원은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생각이 모두 일치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비록 간관들이 앞에 나서기는 했지만, 정몽주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정몽주는 부모의 기대 속에서 훌륭하게 성장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격동의 시기를 살아가기에는 버거움이 많았는지 ‘허무한 말을 꾸미고 대간들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가를 요란하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참수되고 말았다. 공양왕 4년(1392) 4월 4일이었다. 그가 사망한 지 100일 만에 고려왕조는 막을 내리고 조선이 들어섰다. 정몽주를 마지막 고려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p.324~325

정도전은 조선 개국 후 국가의 기틀을 세우면서 정치를 포함해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유학자의 길을 걸었다. 권력이 부조리하게 유용되는 정치 권력을 통제하는 정치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등 조선의 정치체제에서 유교 이외의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도록 했다. 신왕조의 수도를 정하는 논쟁에서 고려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풍수지리를 과감하게 배제한 것도 정도전이 조선 개국 과정에서 보여주었던 사상적 유연성과 비교되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다 해도 그는 교조주의자가 아니었다.
--- p.340

정도전에게 사대 외교와 자주성 확립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대는 국가의 안녕을 보전하기 위한 선택이므로, 오랑캐라도 세력이 강대하다면 일시적으로 머리를 숙일 수 있다”며 사대 외교의 목적을 ‘백성과 국가의 평안’에 두었다.(……) 외교에서 ‘섬김도 파기할 수 있다’는 근거는 ‘왕이 부도덕하고 독선적일 때 신하가 왕을 파기할 수 있다’는 논리와 같은 맥락이다. 정도전이 명나라에 사대하면서도 조선의 국방과 재정, 문화적 주체성 강화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국의 이익과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현실론자였다.
--- p.355~356

한양 건설에서 보여준 또 하나의 특징은 종묘와 사직, 궁궐과 관아, 시장과 민가, 학교와 사당을 조성하여 최대한 공적 건물과 공적 기능만으로 채웠다는 것이다. ‘조선의 궁궐은 고려에 비해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하고 장중한 자태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점포의 크기를 제한하고 대신들의 저택도 40칸을 넘지 못하게 했으며, 숙석(熟石, 석공이 솜씨 있게 잘 다듬은 돌) 같은 사치품 사용을 금하여 절제된 도시를 조성했다. (……) 정도전은 한양을 조성하면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철학을 철저하게 따랐고, 태조는 그 공을 치하하며 정도전을 ‘유학의 으뜸이요, 나라를 세우는 공도 으뜸’이라는 뜻으로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고 칭찬했다. 정도전이 한양 건설을 축하하기 위해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어 태조에게 바치자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병풍을 만들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에게 각각 하사했다.
--- p.371

정도전은 나라의 근본을 세우기 위해 통치 체제는 중앙집권제를, 통치 철학은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를 기저로 하여 문물제도의 정비에 필요한 백과전서식 교재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태조 3년(1394) 3월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태조에게 바쳤고, 이를 받아본 태조는 감탄하며 말과 비단, 백은白銀 등을 하사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의 편찬에 기초가 된 우리나라 최초의 포괄적인 정치체제 연구서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법전이다. 이 법전은 ‘중국의 사례와 고려의 경험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립했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제도와 운영 원리를 제시하여 정치를 중심으로 모든 사유事由를 구성했다’고 평가받는다.
--- p.378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국가의 명운이 달려 있음을 의미했다. 물론 공이 있는 사람은 이방원을 가리켰지만, 이방원은 이름조차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못했다. 이에 이방원은 누구보다 불만이 컸고, 불평의 화살이 정도전에게 향하게 된다. 이방원의 불만은 태조와 신덕왕후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현직 왕과 왕비였다. 정도전은 태조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실권을 쥐고 개국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진두지휘하고 있었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책임도 맡고 있었다. 때문에 정도전이 태조 이후의 후계 구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표적으로 지목했다.
--- p.396

이방원은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으면 간신奸臣이 나와 권력의 전횡을 일삼는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는 약속을 중시하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을 혼동시키는 데 익숙했다’는 역사적 경험에도 주목했다. 따라서 이방원의 눈에는 정도전이 비록 혁명에 참여하여 조선을 기틀을 다지는 등 최고의 공신이었지만, 왕조 국가의 관점에서 보면 일개 신하임에도 권력 구조를 논하며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구축하려는 그를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정도전을 부정했고, 피바람을 몰고 온 왕자의 난을 두 차례 치른 뒤 조선의 3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서 정도전의 존재감은 지워졌다.
--- p.400

요동 공벌은 자주성 고취라는 명분을 내세워 민심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실행 여부와 관계없이 내정 개혁에 유효한 카드였다. 그런 점에서 정도전은 남은 등을 비롯한 동료들이 요동 공벌을 거론하는 것까지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처형당함으로써 요동 공벌은 승자의 기록만 남게 되고, 그 동기와 과정에 숱한 의문을 뒤로한 채 실체는 사라지고 말았다.
--- p.419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국가에 대한 충성을 내세우며 왕권과 왕실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국한 지 10년도 되지 않은 조선은 충신을 배출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태종은 고려왕조로 눈을 돌려 조선과 가장 가까운 시기를 살았던 정몽주를 호출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정몽주의 충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의 결단은 고려의 잔재에서 벗어났다는 자신감이 한몫했다. 그만큼 새 왕조의 골격이 빨리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후 ‘충신 발굴 사업’이 강화되면서 ‘정몽주 숭배 사업’도 확대된다. 그 결과 정몽주는 조선이라는 왕조 국가에서 충절에 대한 하나의 좌표 또는 전도사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 p.469

“간신奸臣 정도전이 표전 때문에 견책을 받게 되어 황제가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치며 명령을 거부하려고 음모하였다. 무인년(1398) 가을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모든 적자嫡子를 제거하고 어린 서얼庶孼을 끼고 제멋대로 자신의 뜻을 펴고자 밤에 사제(私第, 개인 소유의 집)에 모이곤 하여 그 화단禍端의 기미가 이미 긴박하였다. 전하(태종)께서 이를 밝게 살피어 남김없이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정종)을 세자로 세울 것을 청하므로 인륜이 바로잡히고 종사가 곧 안정되었다.” 권근은 정도전을 간신으로 규정하여 “그 일파를 제거함으로써 인륜이 바로 서고 종사가 안정되었다”며 마지막까지 태종의 집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p.487

고종 2년(1865) 9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의 공훈과 지위를 회복시키고 시호를 내려 제사를 받들 후손을 세우라고 대왕대비(신정왕후)가 명했다. 정도전이 사망한 지 467년 만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대원군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한 정도전의 복권 작업은 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경복궁 중건을 통해 왕실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정도전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영조·정조·대원군은 모두 통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 정치를 추진했던 특별한 경우에 해당했다. 따라서 관점을 달리하면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조선에서도 감당하기 버거운 존재였던 것이다.
--- p.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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