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이 일어난 1950년, 그해 7월 7일, 충남 서산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나는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결혼 후 몇 해 동안 자식을 얻지 못한 터라, 딸인데도 나를 무척 기뻐하셨다. 이쁜 딸이 태어난 기쁨에 대문 앞에 고추랑 숯을 주렁주렁 달아 금줄을 멋지게 쳤다고 한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불쑥 집마당으로 들어온 지나가던 스님이 던진 청천벽력 같은 말 한마디에 나는 태어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온 가족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허허, 이 아이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먼. 세 번 시집 가도 세 번 다 실패하고, 혼자가 될 운명이야. 쯧쯧, 결국에는 무당이 될 팔자라고! 허허!”
“큰일 났구나! 세 번씩이나 이혼하고, 무당까지 될 팔자라니! 이혼해서 손가락질 받고 천덕꾸러기가 될 바에는 차라리 내가 데리고 살아야겠어.”
불교 집안은 아니었지만 집안대대로 기복신앙을 신봉하며 우상을 섬겼다. 집 안에는 성황당도 있었고 정화수를 떠 놓고 복을 빌곤 했다. 스님의 말은 아버지에게 벼락같은 충격을 주었다. ‘아, 세 번 이혼에, 무당이 될 아이라니…….’, 아버지의 기쁨은 순식간에 염려로 변했다. 그때 아버지가 묶여버린 스님의 말은 내가 사는 날 동안 인생의 크나큰 올무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사주가 드센 첫째 딸’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불행하게도 태어난 지 불과 며칠 만에…….
이후로 부모님은 나를 염려하느라 한시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곱게 키운 딸이 정말 무당이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걱정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안타까움 때문인지 아버지는 자녀 중에서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까지 당신 등에 업고 학교에 데리고 가셨으니 말이다. 먹고 살기 팍팍하던 그 시절에도, 나는 어미 새의 보호 아래 숨은 새끼 새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중매로 만난 모태 신앙인 남편
어느덧 스무 살이 되었다. 혼기가 꽉 찼지만 시집을 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니, 결혼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아예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집가지 않고 최대한 버티고 싶었다. 사는 게 버거운 탓에 부모님이 자주 싸워 우리 가정은 행복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내 뜻과는 상관없이 한시라도 서둘러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 시절엔 부모가 당신의 짐 좀 덜자고 아들은 머슴으로, 딸은 식모로도 보내던 때였다. 이듬해인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나는 부모님에게서 등 떠밀려 시집이란 걸 가야만 했다.
중매로 남편을 만났다. 친정 큰어머니와 남편 쪽의 시이모님(시어머니의 언니)이 다리를 놓았다. 첫 만남에 나는 남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다지 끌리는 외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남편은 나에게 적극적이었고 시이모님까지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여 나는 싫다 좋다 말해볼 틈조차 없었다. 많은 식솔이 부담스러워 하루라도 빨리 나를 서둘러 집에서 내보내고 싶은 어머니와는 달리, 나의 결혼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 스님 말대로라면 시집가면 너는 언젠가는 이혼하게 될 거고 무당이 될 게다.”
아버지는 상대가 누군지는 묻지도 않으시고, 결혼은 절대 안 된다며 나의 결혼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여전히 큰딸의 사주에 묶여 사시는 아버지와 무심코 지나가던 스님의 허튼소리를 아직도 믿느냐고 하시는 어머니는, 나의 결혼문제로 크게 다투셨다.
선을 본 남자와의 만남이 계속 될수록 하루라도 빨리 시집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커졌다. 시집 보내 달라며 아버지께 떼를 쓰며 매달렸다. 무당 될 팔자라는 말이 여전히 두려웠지만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남편에게 믿음이 갔다. 남편은 여전히 적극적이었고 시이모님과 친정어머니도 내 편이어서 나는 결국 아버지의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삶이 펼쳐질지 알 수는 없으나 기구한 운명과 부딪혀 이겨내 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정말 잘 살아야 했다. 꼭 그래야만 했다.
---「1 chapter 세 번 이혼에 무당이 될 아이」중에서
큰어머님이 나를 데리고 가신 곳은 ‘용(?)’하다는 무당집이었다. 아주 큰 주택 집 건넛방에 신방을 차린 무당은 나를 보는 순간, 앞으로 무당이 되어야 하는 팔자라면서 내가 몸이 아픈 이유도 신병 때문이라며 나를 가엾게 여겼다.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라며 내 귀를 의심했지만, 언젠가 터질 게 터진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걱정하던, 무당이 될 팔자라던 그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귀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거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 뒤로도 무당은 나에게 뭐라고 계속 말하는데, 나는 기운마저 하나도 없어 그 말이 도통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무당이 된다는 말에 아픈 것도 잠시 잊었다. 나더러 신어머니 팔자처럼 살라고…?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신어머니
사실 친정에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 말고도 또 한 명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무당인 신어머니였다. 신어머니는 이틀이 멀다 하고 굿거리를 들고 계룡산으로 가서 굿을 하고는 며칠 만에 친정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먹고 마시며 지친 몸을 회복시키고, 다시 굿을 하러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런 신어머니의 모습을 늘 보았다. 내가 무당이 되면 신어머니처럼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무당이란 팔자는 남편과는 이혼해야 하고 아이들과도 함께 살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늘 술을 마셔야 하고 귀신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해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귀신은 질투심이 강해서 귀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순종할 때까지 죽도록 괴롭혔다. 나는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자랐다. 그런 만큼 무당의 순리를 잘 알고 있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앞이 캄캄했다. 앞으로 나의 미래는,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깊은 절망과 고민에 빠져 한참 동안 멍하니 무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교회에 나가 예수 믿어
보다 못한 무당 아줌마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내가 무당을 안 해도 되는 길이 딱 한 가지 있는데, 그 방법은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했다. 귀신보다 하나님의 신이 더 세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무당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정말 뜻밖이라 너무 놀랐다. 그러면서 나에게 한 가지를 신신당부했다. 예수를 믿되 대충 믿으면 안 되고, 교회에 열심히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좋은 방법이 있다면서, 왜 정작 본인은 무당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의아해서 곧바로 물었다. “그런데 아줌마는 왜 예수 안 믿으세요?”
“이제 다 늙어서 어떻게 예수를 믿어. 하지만 젊은이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예수를 믿으면 무당 노릇 안 해도 돼!”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장 교회에 다니라고 하면서 내 얼굴에서 십자가가 보인다고 했다.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이상했다. 복채는 안 받겠다며 빨리 교회에 나가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에라도 교회에 나가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무당이 싫고, 술도 싫고, 계룡산도 싫어. 혼자 사는 것도 싫어. 무당집에 붙어 있는 그림들이 무서워. 무엇보다 우리 딸들을 무당 딸이 되게 할 순 없어. 빨리 예수를 믿고 절대 무당은 되지 말아야 해.’ 나는 집으로 오면서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몸에 새 힘 또한 생겼다.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아무리 무당 아줌마가 ‘귀신보다 하나님 신이 세다’고 했어도, 귀신이 나더러 배신자라며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이를 어떻게 하나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었다. 나는 일단 부딪혀 보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빨리 집에 가서 밥 먹어야지!’하는 생각과 함께 몸에서는 새 힘이 생겨서 날아갈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난생처음으로 “하나님”하고 불러 보았다. 어색한 이름이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계속 부르고 싶었다. 무당이 되는 과정은 병을 얻고 잃어야 할 것이 많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내 삶에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마음에 평화가 생기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어쩌나. 주일이 되려면 아직 3일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나는 3일을 어떻게 기다리나 하는 생각으로, 내 삶 속에서 몇 년 만에 느껴보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 기쁨은 내가 그동안 살면서 느꼈던 기쁨과는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그 기쁨이 앞으로의 내 인생에 완전히 다른 삶을 선물해 줄 것만 같았다.
---「8 chapter 무당이 예수를 믿으라니」중에서
우리 집에서 속회 예배를 드린 어느 날이었다. 속도원들은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오늘 저녁에 어디에서 만날까? 은혜 받으러 가야지.” 어디에 가자는 걸까? 왜 나에게는 가자는 말을 안할까? ‘나도 받는 거 뭐든 정말 좋아하는데…….’ 속도원이 가고 난 뒤, 나는 혼자라도 가겠다고 마음 먹고, 아무래도 담을 것이 필요할 것 같아 큰 보자기를 챙겨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속도원들이 어느 조그마한 교회로 들어가기에 나도 슬며시 따라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아, 무엇을 나눠주겠다고 한 곳이 교회였구나. 은혜라는 걸 주려면 빨리 좀 주지.’ 나는 언제 그 선물을 줄지 기다리며 목사님의 찬송과 설교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싱겁게 아무것도 주지 않은 채 예배는 끝났다. 그런 예배가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차례나 열린다는 광고를 들은 뒤라, 오늘은 첫날이라 안 주나 보다 생각하고 다음 날에도 갔다. 준다던 걸 혹시 언제 줄지 몰라 줄 때까지 기다린다 하는 각오로 새벽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부지런히 다녔다.
3일째 되던 날이었다. 목사님께서 안수 기도를 해주신다며 모두 눈을 감으라고 했다. 도대체 언제 주려고 그러지? 혹시 남들 몰래 ‘은혜’란 걸 주는 것 아닌가 싶어 몰래 실눈을 뜨려는데 갑자기 눈꺼풀이 붙어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머리통만 한 빨간 불덩어리 하나가 맨 앞사람부터 한 사람씩 각 사람을 태우는 것이 아닌가! 저 불덩어리를 맞으면 나는 타 죽겠구나. 무서워서 도망가려는데 엉덩이가 마룻바닥에 붙어 몸이 꼼짝 안 했다. 아뿔싸! 급기야 그 불덩어리가 나의 머리와 가슴에 와서 닿았다. 그 순간 나는 “하나님!”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세요. 그리고 용서해주세요!”
죄인인 나를 용서해주신 은혜
바로 그 순간, 6년 동안 중풍을 앓고 계신 친정아버지가 떠올랐다. 가족 모두가 병간호에 지치고 병원비로 고통스러워했다. 언제부터인가 아프신 친정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너무 싫고 귀찮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돌아가셨으면 하고 바랐다. 하나님은 가슴에 붙여 놓으신 불덩이를 통해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지 않은 죄와 아프신 아버지를 미워했던 내 모습을 깨닫게 하시면서 그 죄를 물으셨다. “살려주세요. 하나님. 아버지를 미워한 거 용서해주세요. 이 불효를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한참을 기도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죄인 줄 몰랐던 사사로운 거짓말과 속였던 작은 죄까지 깨닫게 하시는 그 불덩이를 붙들고, 나는 통곡하면서 회개 기도를 했다. 하나님이 내리신 뜨거운 불덩어리라 굳게 믿고 용서해주실 때까지 나는 불덩어리를 놓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니 내가 붙잡았던 불덩어리는 알고 보니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해 주시던 목사님의 한쪽 다리가 아닌가.
그날, 드디어 ‘은혜’를 받았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선물 받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내가 일종의 물건쯤으로 오해해서 큰 보자기에 받아 가려고 날마다 부흥성회에 참석해서 오매불망 기다렸던 ‘은혜’란 것은, 사실은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이었다. 죄로 더렵혀진 나의 영혼 밭이 ‘회개’로 깨끗해지니 하나님의 충만, ‘성령님’이 내주하여 주셨다. 더불어 은혜의 선물로 ‘방언 기도’를 함께 받았다.
나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기도의 불’이 붙은 것이다. 하루에 2~3시간도 좋고 8시간도 좋고 시간이 닿는 대로 기도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오래 기도하는데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기도하면 할수록 새로운 힘이 생겼다. ‘은혜’ 받은 그날 이후 71세를 맞은 오늘까지 나는 기도를 쉬어 본 적이 없다. 지금껏 수십 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장 큰 ‘은혜’이다.
---「13 chapter 하나님이 주신 선물, 불같은 회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