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는 어렵지 않게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햇볕 쨍쨍한 날 공원에서 옷을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이나, 그 상태로 배드민턴이나 조깅 등 가벼운 운동을 즐기는 이들, 나체로 호수에 뛰어들거나 숲속에서 산책을 즐기는 이들 등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옷을 벗고 있다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는 없다. 이러한 누드문화가 베를린 전체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는 동베를린에서 비롯된 건전한 문화 중 하나로 ‘프라이쾨르페르쿨투어(Freikorperkultur, FKK)’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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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인발리덴공원(Invalidenpark)을 지나다가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지구 아닌 대안행성은 없다(There’s no planet B)”라거나 “기후가 아니라 시스템을 바꿔라(Change the system, not the climate)”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 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방송국 앵커와 신문기자 등이 이들을 취재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근처에서 쭉 지켜보던 30대 남성에게 “이 사람들은 뭘 위해 구호를 외치는 것이냐”라고 묻자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운동 중이다. 매주 금요일마다 이렇게 모인다”라고 알려주었다. 그가 자리를 뜨지 않기에 이 운동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물으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는 웃으며 이 시위는 10대 학생들이 이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군중을 향해 소리치는 이들이 꽤 어려 보였다. 정말 10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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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채우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하하 호호 웃음이 끊이지 않는 행복한 사람들이 지나갔다. 한국에도 벼룩시장이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에 케밥을 가득 물었다. 그러다 문득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깨달았으니, ‘독일에 벼룩시장이 활성화된 데는 이곳 특유의 근검절약 정신뿐 아니라 일요일에 마트를 운영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도 크게 이바지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만 해도 한국에서는 백화점은 매주 일요일, 마트는 격주 일요일에 문을 여니 굳이 벼룩시장을 찾을 이유가 없었지만, 독일에서는 일요일마다 늘 벼룩시장을 즐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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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베를린의 개는 사람이 기르는 개였는데도 한국의 개와는 달랐다. 독일은 개 친화적 국가로 많은 사람이 개를 키운다. 베를린 역시 마찬가지다. 베를린에만 2016년 기준 10만 마리의 개가 반려견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곳곳에서 개를 볼 수 있다.
출퇴근 시간 북적거리는 에스반과 우반, 버스에서 견주와 함께 탄 개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버스에서 문득 고개를 아래로 떨궜더니 개의 머리가 엉덩이나 발목 부근에 있던 적도 많다. 식당에 가도 견주와 함께 온 개를 쉽게 볼 수 있다. 합석이 흔하기에 내 바로 옆에 큰 개가 앉을 때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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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바의 분위기가 독특하다며 구석구석을 촬영했다. 그런데 바텐더가 갑자기 화를 냈다. 신경질적으로 “사진 찍지 마”라고 외친 바텐더는 “사진 찍지 말아달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머쓱해진 친구가 나를 보고 웃었다. 평소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이 아니고, 본인도 바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면서 말이다. 친구는 “확실히 베를린 사람들은 사진을 별로 찍는 것 같지 않아”라면서도 예의 없었다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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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인간적 감성의 도시다.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보다는 눈에 담기를 좋아하고, 태블릿으로 전자책을 읽기보다는 종이책이나 신문을 선호한다. 사람들이 늘 책을 들고 다니니 서점들도 북적인다. 베를린의 서점 중에는 프로 큐엠(Pro qm), 두스만(Dussmann), 발터 쾨니히(Walther Konig), 모토(Motto), 소다 북스(Soda books) 등이 유명하다. 각 서점은 자기만의 매력으로 손님을 모으려고 노력하는데, 보통 한 분야의 책을 집중적으로 판매하거나 독특한 큐레이션을 제공해 손님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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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문 앞의 한 기념품점 직원에게 진짜 베를린장벽 파편을 판매하는지 물었다. 그는 모두 진짜라며 “아마 다른 가게에서 파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라고 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다시 물으니 “파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라고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그의 말처럼 파편은 정말 많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워낙 길게 지어졌기 때문인데, 콘크리트 석판 약 4만 5,000개가 들어갔다. 각 석판의 크기도 어마어마한데, 사람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높이 3.6미터, 너비 1.2미터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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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힙스터 도시’로 알려지며 관광도시로 자리 잡았다. 2015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힙스터 열풍이 불었다. 이들에게 베를린은 물가가 저렴한 가난한 도시이고,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 하위문화가 발달한 섹시한 도시이며, 각종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인 도시로서 구미가 당기는 곳이었다. 최근 인터넷에서 인기인 ‘힙스터 테스트’를 살펴보면 36번 문항이 ‘최근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베를린이다’일 정도다. 이처럼 베를린은 명실상부 힙스터의 성지가 되었다. 특히 크로이츠베르크와 노이쾰른 등이 가장 크게 부흥했는데, 수많은 그라피티와 떠들썩한 밤문화, 멋진 카페와 초소형 농경지가 두 지역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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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답답한 마음으로 홀로코스트기념관을 둘러보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의외로 나 같은 이들이 몇 없는 것 같아서였다. 중학생 또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들은 비석 위에 올라가 이 비석 저 비석을 마구 뛰어다녔고, 젊은 부부는 아이를 비석 위에 올려놓고 춤추게 했다. 20대 남성은 비석에 올라 다리를 크게 벌리고 팔을 위로 뻗어 세상을 정복한 표정을 짓고는 연신 자기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댔다. 기분이 꽤 이상했다. 분명 기념관은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애도하라고 만든 공간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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