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나티스트(Donatists)의 선구자들
- 몬타니스트(Montanist)
2세기 중엽을 막 넘어설 즈음 프루기아(Phrygia)의 몬타누스(Montanus)라는 사람이 스스로 예언자임을 자처하고 나왔다. 몬타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때부터 벌써 교회의 순수성을 역설하기 시작했고, 성령의 능력이 직접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도 이때부터 벌써 강조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도 특별히 주목했다.
대부분의 운동들이 다 그렇듯이, 이들에게서도 갖가지 유형의 광신적 양상이 엿보였는데, 특히 소아시아 지역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역설한 것들을 모두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서방 교회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몬타니스트 사상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학자는 터툴리안(Tertullian)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하면 교회가 한층 더 영적으로 건전해 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얼마나 고심했던가를 그의 저서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터툴리안과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영적”(pneumatic) 교회라고 스스로 자부함으로써 “육신적인”(physical) 교회에 대항하는 대립적 자세를 분명히 했으며, 믿는 사람들 각자가 모두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이요,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터툴리안은, 예컨대, 「단혼주의에 대하여, On Monogamy」라든가, 「여성의 복장에 대하여, On Apparel of Women」, 「금식에 대하여, On Fasting」 등, 후기에 쓴 논문들을 통하여 몬타니스트 특유의 사상적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 논문들은 교회론 언저리를 맴돌기보다는 몬타니스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에 대한 엄격한 생활관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몬타누스 자신에 관해서라면, 그의 반대자들이 전하는 이야기 말고는 이렇다 할 만큼 알려진 게 별로 없다. 프레데릭 파라르(Frederic Farrar)에 따르면, 터툴리안과 그의 추종자들이 내세웠던 기본적 정통 노선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으되,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예언의 메시지를 받는다든지, 몽유 내지 몽환 상태에 들어가야 예언의 능력이 나온다든지 하는 등과 같은 견해를 채택함으로써 몬타니스트 운동은 곁길로 벗어나게 되었다. 몬타니스트들 사이에 광신주의가 싹트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견해들을 채택한 데서 비롯되었고, 이것이 결국 몬타니스트 운동을 쇠퇴케 만드는 요인이 되었던 게 분명하다. “몬타니스트들이 다방면에 걸쳐 초대 교회의 규율과 실천 지침들을 회복하고자 순수하고도 진지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파라르는 자신의 저서 「교부들의 생애, Lives of the Fathers」 중에서 언급한다. 그들의 이러한 성향은 오래지 않아 분리된 몬타니스트 교회가 동방 지역에 형성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서방에서도 결국 몬타니스트 교회의 분리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서방은 동방에 비하여 카톨릭의 울타리 내에 머물러 있던 기간이 좀더 길었다.
- 노바티안(Novatians)
그리스도인들의 초기 수난기 가운데 하나는 A.D. 249년에서 250년까지에 걸친 데시안 박해기(Decian Persecutions)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던 자들 가운데 자신들의 신념대로 끝까지 진리 편에 서 있지 못한 채 배교로 돌아서 버린 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박해가 마무리되자 이들 “잘못 생각한” 사람들을 관용으로 대하고 다시 교회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여부를 놓고 교회들 간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로마의 주교 노바티안(Novatian)은 다른 사람들과 합세하여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주님을 부인한 자들을 결코 교회의 교제권 안으로 다시 영입해 들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노바티안과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는 기본요건에 대하여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것보다 더 엄격하게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웬만하면 누구나 교회 회원이 될 수 있는 느슨하고 수용적인 분위기가 그때 이미 널리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바티안들이 이처럼 완강하게 주장하고 나옴에 따라 결국 성별주의 집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그것이 그 후로도 수세기 동안 존속했는데, 이 운동이 낳은 분리주의 교회 그룹이 정통 카톨릭 교회와 평행선을 그으며 대립하게 되었다. 필립 샤프 (Philip Schaff)가 자신의 저서 「기독교 교회사, History of Christian Church」 중에서, “노바티안들은 자신들만이 순수한 공동체라고 믿었고, ‘잘못 생각한’ 자들이나 크게 빗나간 그 밖의 범죄자들을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를 더럽힌 교회들을 파문했다.”고 기술한 것은 실로 적절한 표현이었다. 맥도날드(H. D. McDonald) 같은 사람은 「기독교 교회 새 국제 사전, The New Internatiopnal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중 “노바티아니즘”(Novatianism) 난에서 이 노바티안들을 일컬어 교회 내에서 “청교도당”(Puritan party)으로 불렸던 반(反)교황주의자들(antipope)로 몰아붙인다.
- 노바티안에 대한 시프리안(Cyprian)의 반박
시프리안(Cyprian)은 A.D. 250년경의 카르타고(Carthage) 주교였다. 데시안 박해 기간이 끝나고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자 시프리안은 「카톨릭 교회의 통일성, The Unity of Catholic Church」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 책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노바티안과는 반대되는 색채가 농후하다는 점에서 다분히 노바티안과 대립적인 위치에서 그 저서를 집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시프리안은 노바티안들의 교회에 대하여 매우 강경한 입장을 나타냈는데, 훗날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카톨릭의 공식 입장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이 그 교회의 성직자 계급에게 부여되었다고 역설했다. 모리스 베베노트(Maurice Bevenot)가 번역한 「성 시프리안, St. Cyprian」이란 책을 보면 시프리안은 “교회의 통일성은 주교들의 권위로 형성되고 회원 각자는 그 전체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점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교회 내의 여하한 분파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결코 더렵혀질 수가 없다. 그녀는 결코 범할 수 없는 신성하고 정숙한 존재다... 누구든지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부정한 집단과 연합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는 것인즉, 그리스도의 교회에 등을 돌린 자는 그리스도의 보상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교회를 떠난 자는 국외자요, 세속인이며, 교회의 적이다. 그대가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대는 하나님도 아버지로 모실 수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평강과 조화를 깨뜨리는 자는 그리스도께 대적하는 것이다.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모이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다." (모리스 베베노트 Maurice Bevenot 역, 「성 시프리안, St. Cyprian」 중에서)
그러면서 시프리안은 분리주의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통일을 호소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시요,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며, 그분의 교회 또한 하나이다. 교회는 믿음에 있어서 하나요, 융화로 접합되어 강력한 통일체를 이룬 사람들 또한 하나이다... 어미 둥치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어느 가지도 따로 숨쉬며 살아갈 수가 없는 고로 그 가지는 구원의 모든 소망을 상실하게 된다." (모리스 베베노트 역, 「성 시프리안, St. Cyprian」 중에서)
그는 또한 분리주의자들이 사랑을 결핍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분께서는 서로 사랑하고 연합하라고 하나님의 권위로 무게 있게 가르치셨다... 그러나 불화를 일으키고 교회를 갈라놓으려고 날뛰는 자들이 어떻게 통일성을 유지하겠으며,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겠는가? 이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리스 베베노트 역, 「성 시프리안, St. Cyprian」 중에서)
--- p.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