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한은 옛말·방언·북한어·우리말 등을 실로 다채롭게 활용하였다. (······) 당시 북한의 어문학계에서는 조선로동당의 인민적 문화 정책에 따라 민족어의 풍부화를 위한 연구가 강조되고 있었다. 이에 그는 김일성대학 조선어문학부 조선문학과 교수이자 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 연구사로서 민족어의 계발에 관심을 가지고 고전 번역을 수행한 것이다. (······)
그러면 『정다산선집』에서 과연 ‘민족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옛말·방언·북한어·우리말’순으로 훑어보겠다. 먼저 옛말 단어부터 보면 지금도 그것은 대부분 방언이나 북한어로 상용되고 있다.
가름길(갈림길), 잔나비(원숭이), 사심(사슴), 이으다(잇다), 머추다(멈추다), 쉬우다(쉬다), 구짖다(꾸짖다), 휫두루(휘뚜루), 본대(본디), 무삼(무슨), 안해(아내), 서름(설음), 소곰(소금), 부루(상추)
『조선말대사전』에는 ‘가름길, 잔나비, 쉬우다, 안해, 본대, 부루’가 실려 있다. 옛말 형태 그대로 ‘안해’라고 표기한 것이 특히 눈에 띈다. 위의 모든 옛말은 최익한이 방언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그 경계가 모호하다. 그렇지만 아래의 ‘옛말 어미’들을 보면, 그가 민족어의 확장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난다(-는가), -난고(-는고), -거니(-는데), -나니(-느니), -뇨(-냐), -과저(-고자), -ㄹ소냐(-ㄹ쏘냐), -ㄹ손가(-ㄹ쏜가), -오대(오되), -오리니(-ㄹ 것이니), -오이다(-습니다), -어늘(-거늘), -고야(-구나), -매라/메라(-구나), -ㄹ세라(-구나)
그는 1950년대 북한에서 대중에게 통용될 수 있는 옛말 어미를 사용하여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것이 방언과 잘 조화되어 매끄러운 번역으로 이어질 때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화정에 올라(登羽化亭)」를 들 수 있다. (······)
다음으로 방언은 주로 강원·경상 방언을 채용하였는데, 제주에서 함경 방언까지 두루 걸쳐 있다.
너래(바위), 애꾸진(애꿎은), 꾕기(꿰미), 으즛하다(의젓하다), 살매(살갗), 자무락질(무자맥질), 얼분(거드름), 바루(바로), 살저름(살점), 비나장(비녀장), 부르뜨다(부릅뜨다), 부쇠(부시), 고무도적(좀도적), 오락지(오라기), 날세(날씨), 삐다(버리다), 맨주(만주滿酒), 혀까래(서까래), 엉패를 부리다(행패를 부리다), 오양간(외양간), 구실(구슬), 불치다(불까다), 하로(하루), 헐미(헌데), 간해(지난해), 무라리(우박), 챙견(참견), 고누다(겨누다), 등어리(등), 딿다(따르다), 아람(아름), 너을다(씹다), 논다락(논배미), 논골뱅이(우렁이), 어러기(어루러기), 멍어리(멍울), 눈청(눈망울), 꽁대기(꼬랑이), 채쭉(채찍), 흐달리다(휘달리다), 뼈다구(뼈다귀), 쏘물게(촘촘히), 상기도(아직도), 말방아(연자방아), 떼배(뗏목), 개골물(개울물), 귀때기털(귀밑털)
여기에서 ‘맨주’나 ‘엉패를 부리다’는 경상 방언으로 현지인도 잘 모르는 말인데, 최익한은 자유자재로 쓰고 있다.
‘맨주’는 ‘만주滿酒’, ‘이취泥醉(몹시 취함)’의 뜻이다. 그 예로, “산수의 낙樂에 맨주가 된 선생”(『여유당전서를 독함』 p153), “천성이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맨주가 되었다”(『조선 명장전』 p191), “수양버들 그늘 아래 맨주되어 누웠네”(『정다산선집』 p286)가 있다.
‘엉패’는 ‘행패’의 뜻으로 ‘~를 치다/부리다’의 형태로 쓰인다. 그 예로, “호랭이 엉패를 치고 잇으되 남은 한 집은 문을 닷고 잇는지라”(『여유당전서를 독함』 p392), “턱도 없는 노릇을 요구하는 것이 결국 엉패만 부리는 헛수작이구려”(『강감찬장군』 p38), “이리보다도 흉포한 이정里正은 애기 군포 바치라고 엉패를 부린다”(『정다산선집』 p289) 등을 들 수 있다. (······)
다음으로 북한어이다. ‘호상互相(상호)’과 같은 한자 기본어 등은 지면상 제외하련다. 북한어는 남한어보다 전반적으로 원시적이고 토속적인 어감을 풍기는 듯하다.
발자욱(발자국), 목고개(고개), 웨치다(외치다), 연기발(연깃발), 웃머리(우두머리), 태이다(타고나게 되다), 잇발(이빨), 동가슴(앙가슴), 터문(처지), 고루다(고르다), 차림차리(차림새), 크낙하다(크나크다), 엇비슴하다(엇비슥하다), 물연기(물안개), 발가내다(발라내다), 일떠서다(팍 일어서다), 살주머니(늘어진 살덩이), 진탕(진창)
‘웨치다, 웃머리, 잇발’은 옛말을 살린 경우이다. 북한어는 최익한이 1956년 9월 『정다산선집』 머리말을 쓸 때까지 8년 넘게 일상생활을 하고, 김일성대나 과학원의 어문학계에서 학술 활동을 하며 체득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위 이청원이 함경도 출신의 역사학자였으니 도움이 되었을 법하다. 참고로 번역·주석을 보조한 류수·리철화의 『정약용작품선집』에는 위의 북한어 중 몇 개만 수록되어 있어 그 영향 관계를 거의 확인할 수가 없다.
끝으로 우리말이다. 최익한은 젊을 적부터 시조를 지었다. 자연 우리말에 대한 관심도 생겼을 터이다. 예로부터 인민들이 실제로 쓰던 조선말은 봉건 사회의 악독한 영향을 적게 받아 그런지 미세한 뉘앙스까지 표현한 어휘가 수두룩하다.
체머리를 흔들다, 가멸다, 어청어청, 덧거칠다, 얼뺨, 튀하다, 들레다, 곱돌다, 더위잡다, 새밭, 말가웃, 보리마당, 어룩어룩, 자우룩하다, 을랑(일랑), 벌물, 종작없다, 물커지다, 처뜨리다, 너르다, 되되이, 젖송이, 등솔, 곱소리, 여봐란듯이
다산 시문을 번역하면서 이 정도로 우리말을 찾아 쓰기가 쉽지 않다. 그 무렵 북한에서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조선어소사전』(1956. 2)이 발행되었다. 또 한자어·외래어의 남용을 막고 옛말이나 사투리 속에 파묻혀 있는 고유어를 찾아내기 위한 언어 정화 사업과 문풍 개선 사업이 전면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 그러므로 최익한은 인민성과 대중성을 염두에 두고 조선의 고유 민족어를 살려 인민 대중의 문화적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는 일련의 역주를 한 것이라 하겠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