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주의 기도를 해설하기에 앞서, 이 기도는 무궁무진한 의미를 품고 있기에 단 하나의 궁극적인 답, 완벽한 설명을 제시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점을 말해야겠습니다. 복음이 그러하듯 이 기도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 자신, 우리 자신의 필요와 질문, 우리의 순례의 여정을 위한 기도가 되어 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기도의 핵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남아 언제까지나 가장 중요한 것, 궁극적인 것, 가장 높은 곳으로 우리를 부릅니다.
--- p.13
진정 성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내면이 자신이 지닌 ‘성스러움’을 알아차리고 자유롭게 이를 갈망하게 합니다. 성스러움이 그를 요구합니다. 이것이 진실로 성스러운 것, 거룩한 것이 지닌 기이한 특성입니다. 성스러움은 단순한 지식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행동이 됩니다. 성스러운 깨달음은 삶과 일치되려 합니다. 2의 두 배가 4임을 알고, 특정 온도에서 물이 끓어오름을 아는 것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는 그저 맞고 틀림, 알고 모름, 천재성과 아둔함의 문제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름다움을, 도덕적 완성을 엿보고, 이 세계와 삶에 대한 특별한 직관을 통해 성스러움을 깨닫고 경험하면, 이 지식은 즉각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우리 안에 어떤 변화를 불러오고, 우리를 어딘가로 초대하며, 우리를 사로잡고 매혹합니다.
--- p.22~23
그리스도는 사랑과 용서를 말했지만 군중은 자신들을 도와주고 치유해주기만을 바랐고, 그분은 ‘아버지의 나라’를 말했지만 군중은 승리만을, 적에게서 해방되기만을 바랐습니다. 군중은 그분이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준수하기를 바랐지만 그분은 술집 주인, 죄인, 매춘부와 먹고 마시며 전통과 관습에 저항하셨습니다. 어쩌면 유다가 그분을 배신한 이유도 이에 실망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자기 뜻을 이루어 줄 그리스도를 기대했으나 정작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를 심판과 죽음에 내어주셨으니 말입니다. 복음서는 이런 예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드라마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우리 모두는, 또 당신은 그리스도께 진정 무엇을 바랍니까? 인정합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뜻(나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원수를 물리쳐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시기를,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시기를, 우리에게 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그분께서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시지 않으면 좌절하고 분노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분을 버리고 부인하기를 반복합니다.
--- p.43~44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먹어야 살고, 그가 먹은 음식이 그의 생명이 됨을 뜻합니다. 이렇듯 인간이 자기 외부에 있는 무언가, 물질, 세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유물론 철학의 창시자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고 밝히 드러내는 바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음식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곧 생명이 창조주로부터 나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궁극적으로 생명은 그분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은 단순히 먹기 위해, 물리적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그분을 닮기 위해, 그분의 형상으로 자라기 위해 삽니다.
--- p.50~51
여기서 음식은 그 자체로 생명을 주는 선물,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지식,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됩니다. 즉 음식은 생명이 됩니다. 하지만 창조주 아버지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심으로 인간이 오직 음식에만 의존하는 상태는 극복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로 아버지께 음식을 받을 때 인간은 거룩한 생명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성경이 인간의 타락과 음식을 연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 p.5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