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를 말할 때 한국의 개신교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한국에서 행했던 모든 일에는 ‘최초’란 말이 으레 붙습니다. 최초의 조직교회 설립, 최초의 보육원 설립, 최초의 세례, 최초의 성찬식, 최초의 유아세례, 최초의 찬송가, 최초의 총회, 최초의 총회장, 최초의 전문학교 설립 등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에는 조직교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온 이후 한국에 수많은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교회 수와 교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헌신적인 전도와 초교파적인 선교 활동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 국의 개신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닙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청년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아무도 선뜻 가려고 하지 않던 한국(당시 조선)에 기꺼이 찾아온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충성한 우리나라 개신교의 위대한 선교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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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는 오직 주님이 가라는 대로 가고, 한국 사람을 주님의 제자로 만드는 일에 일생을 걸었습니다. 전파한 복음이 한국 땅에 뿌리내리도록 보육원, 학교, 병원을 설립하고, YMCA를 통해 인재를 양성했으며, 한국 문화와 한글을 연구하여 한영사전과 영한사전을 출판했습니다. 또한, 찬송가 편찬으로 비로소 한국 사람들 입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오게 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정치, 외교, 문화 등 선교 외적인 일에도 큰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와 함께한 한국 사람 중에는 역사상 기억될 인물들이 많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그 당시 세계 열방보다 약소국이었던 조선 땅에 새로운 문명과 가치를 심어 주고 비전을 준 위대한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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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교사로서의 꿈을 이루려는 나라가 바로 눈앞에 있다.’ 언더우드는 입을 굳게 닫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1884년 12월 16일 미국의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행 기선을 타고 한 달 넘게 태평양을 건너왔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큰 바다와 오랜 항해는 처음이었다. 기선은 언더우드가 26세 되던 해인 1885년 1월 25일 일본 도쿄 옆의 요코하마 항구에 도착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 먼저 와 있던 선교사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래 서 외국인은 쉽게 조선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조 선으로 들어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 선교 사업에 필요한 훈련을 받으며, 일본에 와 있던 미국 선원들을 위한 전도 집회를 여는 등 선교 활동을 꾸준히 했다. 그럴 때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으로 파송한 아펜젤러 선교사를 만났다. 그도 조선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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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구세군 교회에서 하는 길거리 전도 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언더우드는 전도하면서 인종, 계급, 출신, 교파 등으로 차별하며 파벌을 지어 대립하는 단체를 하나로 연합하는 운동을 했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모두 한 형제자매입니다.” 언더우드는 나누어진 교회가 서로 연합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다. 이런 언더우드의 교회 연합 정신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언더우드는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임금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친구요 형제라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교단의 벽을 걷어 버리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외증조부 와우 목사의 교회 통합 정신이 그대로 언더우드에게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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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는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떠돌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부모 없이 아무렇게나 내쳐진 저 아이들을 어떡하나. 저 아이들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생명들인데.”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일하면 서 아이들과 가까이하는 동안 그 들이 얼마나 인간 취급도 못 받으며 불쌍하게 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 저 아이들을 내가 돌봐야겠구나. 이런 것이 선교 아닌가.” 언더우드는 조선에 들어온 그해 말, 고아원 설립을 추진했다. 당시 까다롭던 조선 관리들이 고아원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지 의외로 허가를 쉽게 내 주었다. “됐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언더우드는 고아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돌봐 주고 가르쳤다. 고아원 원장은 조선인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언더우드가 맡아 했다. 언더우드는 고아원과 배움터 역할을 하는 *구세학당을 경영하면서 선교사와 선교사 부인들의 힘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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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는 학당 일에 열심을 다하며 교회 구역마다 초등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의 노력으로 세워진 학교는 겨자씨 같은 작은 시작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점 커다란 나무처럼 성장해 갔다.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때에 활동한 다른 외국 선교사들도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1902년에는 장로교선교회에 속한 학교가 63개, 학생이 천여 명 생겨났고, 1909년에는 학교가 589개, 학생이 이만 이천 명에 이르렀다. 언더우드는 교육 선교를 위해 힘썼지만 앞으로 한국을 복음화하기 위해선 좀 더 적극적인 선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젠 신학교를 세울 때가 된 거야.’ 언더우드는 전에 자신과 뜻을 같이하던 헐버트 목사에게 언젠가 꼭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희망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학당에 신학반을 개설해서 앞으로 한국 선교의 지도자가 될 인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양에 세워진 장로회신학교에까지 가서 강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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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가 경신학교 대학부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총독부는 학교 설립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일본은 대학 설립을 방해하기 위해 별의별 교묘한 방법을 총동원했다. 그 하나의 예가 한국에 대학을 두는 법령을 만들어 놓지 않은 일이었다. 언더우드는 할 수 없이 전문학교령에 의해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연희전문학교는 해방 후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했고, 1957년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합병하여 지금의 연세대학교로 자리 잡았다. 일제 당국은 언더우드가 세운 대학을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더우드를 늘 감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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