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엄마도 아빠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는 건 맞잖아.”
갑자기 엄마가 손을 뚝 멈추고, 물끄러미 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전근하는 아빠를 따라가느라 일을 그만뒀어. 그렇게 맘 편한 거 아냐.”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엄마 말 같은 거 마음 쓰지 말라는 거지. 당신 힘든 거 왜 모르겠어? 히나코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너희 둘을 엄마 혼자 보살피는 거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잖아. 안 그래?”
“뭐, 그야 그렇지만…….”
엄마 혼자 애쓰고 있는 건 틀림없다. 하지만 뭔가 조금 다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엄마가 얼굴을 들어 히나코를 보았다.
“요즘 너하고 얘기하고 있으면 슬퍼져. 엄마는 언제나 히나코를 위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 p.50~51
슈지는 딱 잘라 그렇게 말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슬퍼진다’고 말하는 건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해서 자기는 빠져나오려고 하는 고약한 태도야. 아이는 부모를 좋아하기 때문에 슬프게 하고 싶지 않잖아. 부모는 그걸 잘 알고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차라리 분명하게 ‘너 참 못됐다.’ 하고 말하는 게 나을 텐데.”
그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다.
“‘너 참 못됐다.’ 하고 말하면 뭐가 어떻게 못됐다는 건지 물어볼 수도 있고 반론도 펼 수 있을 텐데, 그냥 그렇게 대화를 끝내 버려.”
슈지는 수첩을 히나코에게 건넸다.
--- p.59
또 같은 소리다. 히나코는 다시 화가 솟구쳤다.
“엄마가 어렸을 때 어땠다는 건 상관없다고. 엄마랑 나랑은 다르니까.”
“다른 건 맞지만 여자라는 건 같잖아. 여자는 공부도 집안일도 다 잘하는 게 좋으니까. 그러니까 히나코도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거고. 엄마가 너보다 인생 경험이 풍부하니까 너보다 잘 아는 거라고.”
결국 내가 지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억울해서 눈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안 돼. 울면 지는 거다.
“나쁜 부모는 자기가 시키고 싶은 걸 억지로 시키는 거야. 게다가 그걸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나쁜 거라고.”
히나코는 고함을 쳤다. 슈지가 한 말이다. 엄마가 놀라 주춤했다. 히나코는 그 틈을 타 자기 방으로 갔다. 가방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고 집을 나와 버렸다.
--- p.84~85
“게다가 이 여자아이, 표정이 정말 좋아.”
“그런가.”
그래, 하면서 하시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자기 의지가 뚜렷한 게 잘 느껴져.”
하시모는 그렇게 말하고는 노트를 덮더니 정성껏 먼지를 닦아 히나코에게 건넸다. 하시모가 뒤 자리로 가고 나자, 히나코는 노트를 책상 아래에 넣으려다 말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살며시 열어 보았다. 자기 의지가 뚜렷한 아이…란 말이지. 나는 자신의 의지가 있을까. 자신의 의지란 게 뭘까. 속에 엄마에 대한 화는 갖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 p.104
그것보다 만약 이대로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히나코는 이미 내리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곧바로 열차 문이 닫혔다. 순간 두려움이 일었다. 나는 또 한 번 땡땡이를 치는구나. 모의고사조차도. 이건 자기 자신의 문제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늘 도망갈 뿐이다.
--- p.113
내 길이라……. 그런데 나는 그걸 알지 못한다.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해?”
“그럴 땐 어쩐지 이 길이 끌리는걸, 하는 쪽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음, 그랬다간 잘 안 될 것 같은데.”
히나코가 이렇게 말하자 슈지가 웃었다.
“그게 말이야, 어떤 길을 선택해도 정확하게 똑바로 뻗은 길은 없어. 구부러져 있기도 하고, 울퉁불퉁하기도 해서 넘어질 때도 있어. 그래도 그게 히나코 길이니까 재미있게 생각하면서 걸어가면 되는 거야.”
굽어 있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단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 보는 게 좋을까.
--- p.129
“그런데 30년 만에 읽으니 내가 얼마나 히나코 기분을 모르고 있었는지 조금은 안 것 같기도 해. 이 수첩은 그때의 내 감정 그대로네.”
“그때 감정?”
“응. 엄마에게 말하고 싶어도 아무래도 말할 수 없었던 어릴 때의 내 마음.”
문득 떠올랐다. 슈지도 그렇게 말했던 게.
“엄마, 부탁이야! 그 수첩 나에게 돌려줘. 내가 갖고 있고 싶어.”
히나코는 간곡하게 말했다.
“그래?”
엄마는 놀란 듯 히나코의 간절한 얼굴과 수첩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조금 웃었다.
“갖고 싶다면 주지, 뭐. 이 오래된 수첩이라도 좋다면.”
히나코가 받아 들어서는 가슴에 꼭 안았다.
--- p.161~162
처음부터 딸과 엄마의 티격태격이 가슴에 와 닿았다. 딸이 없기 때문에 딸과 엄마가 겪는 갈등이나 행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 부분에서 무릇 자식과 엄마가 겪는 갈등이나 행복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부모가 ‘슬프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자식에게 죄의식을 느끼게 하려는 거라는 대목에서는 놀람과 함께 죄책감마저 느꼈다.
나쁜 부모는 자식을 보지 않는다. 보고 있다 해도 겉만 본다. 마음은 보지 않는다. 마음은 보지도 않으면서 시키고 싶은 건 몰아붙인다. 더욱이 그걸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나쁘다. 그랬다.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나빴다.
부모는 늘 나는 자식을 위해 생각한다, 자식을 위해 살고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아이들은 아직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부모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노력한다. 부모는 자기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랬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자식을 잘 알지 못하면서 다 안다고 착각하며 살았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아이가 화자인 만큼 이 책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씌어졌다. 그러나 청소년도 읽으면 좋겠고, 더더욱 부모들에게 권하고 싶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는다’는 8장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주인공 히나코가 어렵사리 뗀 말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15장 제목처럼 ‘바뀌긴 쉽지 않지만’ 시작이 반이라지 않는가.
- 김숙
---「옮기고 나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