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신앙 공동체 세우기
웨슬리 시대는 윤리 이론과 실천에 관해 특별히 깊이 숙고하던 시기였고, 그는 진행 중이던 다양한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세기에는 최고의 윤리사상가들이 많았는데 ... 존 로크, 새뮤얼 클라크, 조지 버클리, 프랜시스 허치슨, 조지프 버틀러, 데이비드 흄, 데이비드 하틀리, 몽테스키외, 리처드 프라이스, 드니 디드로, 장 자크 루소, 아담 스미스, 토머스 리드 등이다. 웨슬리는 그들의 작품 대부분을 읽었고 ... 많은 작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개진했다. 그는 로크의 경험주의에 ...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몽테스키외에게는 완전히 실망했고, 루소의 사상이 가정과 교육에 끼친 결과에는 치를 떨었다. 허치슨과 흄의 환원주의적 자연주의를 반대해 정곡을 찌르는 변론문을 작성했으며,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주창한 리처드 프라이스에게는 항거했다. 웨슬리보다 스물한 살이 어렸던 칸트의 정언명령은 황금률을 가르친 웨슬리에 의해 이미 예시되었다.
나는 자주 이 윤리사상가 목록을 윤리를 전공하는 내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제시해, 그중 자신의 이론을 상호 책임성을 가진 헌신된 공동체에서 실천적으로 이행하는 일에 웨슬리보다 더 관심을 쏟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의견을 개진하도록 권유하곤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언제나 그중 누군가를 웨슬리보다 더 옹호하는 주장을 개진하는 데 힘들어했다. 앞에서 언급한 윤리학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윤리적 삶을 체계적으로 지도하고 실천하기 위해 실제로 공동체를 양성한 사람은 거의 없다. 웨슬리가 윤리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개인적 책임성을 실제적으로 훈련시킨 코치나 멘토로서의 공헌이다.
2장 복음적 경제 윤리
돈을 바르게 버는 데는 제한사항이 있다. 우리는 “생명과 건강을 희생하거나”, 비소나 녹인 납물을 다루는 것같이 “신체에 손상을 주어”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돈을 벌지는 말아야 한다.” “제때 우리 몸에 필요한 음식과 잠을 취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일도 지속해서는 안 된다. 또 건강한 정신을 해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한 바르게 돈을 벌어야 한다. 가치 있는 시간을 우울증이나 분노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방법으로 사용하지 말라.
“이웃의 육체에 해를 끼치면서”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 “건강을 손상시키는 어떤 것도 팔아서는 안 된다.” 약으로 쓰기 위한 목적 외에 ... 증류주를 파는 사람은 사람들을 독살하는 것이다.” 일부러 치료 기간을 오래 끌면서 환자의 고통을 배가시키는 등 “수입을 늘리려 환자의 생명이나 건강을 가지고 장난치는 의사와 약사들은” 똑같이 악하다. 그보다 심각한 것으로, 이웃의 영혼에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음란이나 거짓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술집, 음식점, 오페라 극장, 소극장, 그 외 다른 대중적 인기가 많은 오락장들”에서 돈을 버는 사람들의 도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3장 함께 맞서라
웨슬리 사역에서 직접적 사회 활동의 주된 사례는 생활방식개혁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들 수 있다. 개혁자들은 활동의 결과를 철저히 기록으로 남겼다. “1757년 8월부터 1762년 8월까지 법적 제재를 받은 사람은 9,596명이었다.” 기록 중에는 포르노물, 불법도박, 신성모독의 경우를 기록한 숫자도 있었다. 협회의 사역은 처음부터, 런던의 가난에 시달리는 지역을 가정을 꾸리기에 더 안전하고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열망으로 연합한, 서로 다른 많은 견해를 지닌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는 초교파적 사회 활동이었다.
“젊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여 모든 돈을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든 다음 그들에게도 속이는 법을 가르치곤 하던 각종 투전꾼 … 범죄자들의 소굴을” 찾아내 완전히 뿌리 뽑았다. 개혁자들은 “그중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을 설득해 스스로 땀 흘리며 손으로 일함으로 정직하게 먹고살게 했다.” 다음으로 매춘업자와 매춘부를 내쫓거나 일을 그만두도록 설득하고, 병원에 데려가 치료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병폐를 뿌리 뽑기 위해 매춘업을 하던 많은 집”을 발각해 “법에 따라 고발”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그 일을 그만두었다. 매춘업에 종사했던 여성 중 일부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인정하고 지속적인 회개로 죄를 끊었다.” 여성들 중 많은 사람이 ...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발견하고 “죄 된 삶을 멈추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때 막달라 마리아(Magdalen) 병원을 예비해주셨다. 이곳은 직업도 친구도 없는 그들을 최고로 친절하게 받아들인다.”
4장 전쟁 그리고 평화의 모색
한 나라의 백성은 그 나라의 정치적 죄에 관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지도자들의 죄로 인해 백성을 벌하신다. 백성들은 여러 모양으로 지도자들의 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악이 세상에 널리 퍼지면 모든 사람이 고통 받는다. 나라와 가족은 공동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의로운 행동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듯, 의롭지 않은 행동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그것은 언약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개인이 짓는 죄는 공동체 전체가 함께 나누어지는 죄의 짐이 된다.
... 영국은 자신들의 죄를 온 세상에 전파했다. “대영 제국은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 영국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영국의 영향은 쾌락적 열망으로 가득한 문화로 세계 곳곳을 들끓게 했다. 식민 제국주의에서 무엇이 초래되었는가? “모든 고상한 악이다.” ... 사람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 받는다. 동인도 제도에서 서인도 제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죄는 “그들이 고통 받는 중대한 이유다.”
... 미국 식민지와 영국 모두에서 많은 사람이 “자유를 외치고 있었다.” ... 1776년에는 미국에서, 1789년에는 프랑스에서 더 맹렬한 혁명으로 이어진 시민 불안과 새롭게 대두되는 폭력, 이 광기는 작은 재앙이 아니었다. ... 웨슬리는 만약 전쟁을 한다면 “무정부 상태와 폭정을 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웨슬리가, 베니스와 제노아(Genoa)의 실제 역사의 사례를 들어 혁명에 의존하는 성향을 가진 정치에서 계속 반복되는 문제로 지적한 것은, 무정부 상태는 쉽게 폭정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한 무정부 상태와 완전한 폭정 사이에서 위험하게 동요하던 프랑스 혁명에서 곧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예견한 것이다.
5장 혐오스러운 죄악 노예제도
웨슬리는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설득력 있게 입증하기 위해 노예 조달 과정의 잔인함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노예들은 강압과 사기로 조달된다. 어떤 사람은 배에 초대받아 승선한 후 사슬에 묶여 끌려갔다. 소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해,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보이는 대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붙잡아 미국으로 수송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노예를 좀 더 손쉽게 조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들로 서로 전쟁을 일으키게 충동질한 후 붙잡힌 포로를 팔아넘기게 하는 것이다.” “백인들은 그들에게 술취함과 탐욕을 가르친 후 그들을 고용해 서로를 팔아넘기게 만들었다.”
웨슬리는 운송 과정에서 죽은 사람의 대략적인 숫자를 제시한다. “영국이 미국 식민지에 공급하는 흑인 노예는 매년 약 10만 명에 달한다. 그중 적어도 만 명이 항해 중에 죽는다. 1/4은 여러 섬에서의 적응 과정에서 죽는다. 항해와 적응 과정을 합치면 평균 3만 명이 살해당한다.” 그들은 노예선 탑승 과정에서도 무자비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을 팔기 위해 해안에 내려놓으면, 의사들이 남녀 구분 없이 발가벗겨 철저히 검사한다. 합격 판정을 받은 사람은 한쪽으로 구분해 회사의 문장(紋章)이나 이름이 새겨진 인두를 불에 달구어 그들의 가슴에 낙인을 찍는다. 배에 태우기 전에는 그들의 주인이 남자뿐 아니라 여자까지도 몸에 걸친 것을 모두 벗게 한다. 수백 명을 한 배에 태우는 것이 보통인데, 거기서 그들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좁은 공간에 최대한 빽빽이 채운다. 더위와 갈증, 온갖 악취 속에서 그들이 곧 어떤 상태가 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항해 중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6장 신자의 바른 삶의 지침
“(1)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즉 적어도 약탈, 절도, 통속적 욕설, 술취함 같은 가증스러운 외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 (2) 선을 행하는 것, 즉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자선을 베푼다. (3)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 즉 적어도 교회에 출석하고 성만찬에 참여한다. 세상은 이 세 가지를 행하는 사람을 종교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들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다면, 그것이 의에 주리는 당신을 채워줄 수 있겠는가? 의에 주리는 영혼은 “이보다 더 높고 깊고 고귀한 종교를 원한다. 그는 마치 ‘동풍으로 배부를 수 없듯’ 빈곤하고 얕고 형식적인 종교로는 배부를 수 없다.” 그가 목말라 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연합하는 것, 아버지와 아들과 사귐을 갖는 것,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어떻게 배부르게 되는가?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채워짐으로 그렇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만족시키실 것이다.” 여기에는 성경적 비유가 풍성하게 함축되어 있는데, 배부르게 하신다는 말씀은 하늘의 떡인 하나님의 사랑의 만나로 그들을 만족시켜주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실 것인데, 그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땅에서 행복을 파낼” 수는 없다. 영혼의 자양분이 되지 못하는 것에 돈 쓰는 일을 그만두라.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위해 수고하지 말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당신의 영혼이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일에” 투자하라.
7장 세상의 소금과 빛
기독교를 가시적 외적 표현이 없는 내면적 종교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하늘의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과만 소통하기에 외적인 행위나 사회적 영향과 관계없는 종교로 치부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외적인 열매가 없더라도 ‘영이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경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견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신비주의 운동, 수도원 운동, 은둔 운동 등의 형태로 활동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이런 “감언이설”에 빠지는 것에서 보호해 온유함, 박해를 견딤, 심령의 가난함,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함 등 “적극적이면서도 인내하는 종교를 가장 분명하고 강력하게 가르치셨다.” 세상과 신앙의 관계는 음식과 소금의 관계, 기독교와 사회의 관계는 빛과 어두움의 관계와 같다. 신자의 거룩한 삶은 다른 사람의 습관이나 일상에 스며들어, 가정이 깨지고 회복되는 과정이나 어두운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친다. 모든 인간관계는 가족과 사회 질서에 복음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종교다. 기독교를 은둔의 종교로 변질시키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한다. 기독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며 대화하지” 않고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기독교가 가진 사회적 성격,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 타락한 세상의 구원과의 연관성은 결코 숨길 수 없다. 내면적 성결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온유함의 의미에는 “온화함, 부드러움, 오래 참음”을 드러내는 행동과 외적 표현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모두는 “홀로 내면에만 간직하는 미덕”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표현된다. 더 넓은 견지에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화평하게 하는 일 역시 광야에서는 할 수 없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에서라야 실현 가능하다.
8장 순수한 의도를 가지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은 불행으로 끝나는 확실한 길이다. 우리가 재물을 섬기고 있다면 하나님을 섬기고 있지 않음이 확실하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태도는 둘 모두에 실망하는 확실한 길이다.” 한 사람이 둘 모두를 섬기려 하면 어느 편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없다. 두 신을 섬기려는 사람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정도의 신앙은 있지만 행복하게 해줄 만큼의 충분한 신앙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의 신앙은 그가 세상을 즐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고, 세상은 그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둘 사이에서 오가는 것으로는 하나님이나 세상 어느 편과도 평화를 이룰 수 없다.
그는 항상 “한발로는 전진하고, 다른 한발로는 후퇴하기를 반복한다. 한 손으로는 짓고 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지은 것을 계속 허문다. 한편으로는 죄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미워한다. 언제나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피해 다닌다. 그는 서로 반대되는 것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는 단 하루, 한 시간도 인격의 통일성을 가지지 못하는 모순과 자가당착 덩어리다.” 일관된 사람이 되라. 전심으로 섬길 생각이 아니면 어느 편도 섬기려 하지 말라. 당신이 어느 한편을 섬기면, “다른 한편은 필연적으로 부인할 수밖에 없다.”
9장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좋든 나쁘든 다른 사람에게는 본보기가 된다. 이것이 인간 역사에서 세상을 타락시키는 본보기들의 급류를 만들어낸다. 모든 사람은 그 급류에 휩쓸릴 위험에 처해 있다. “단 하나의 본보기라도 그것이 우리 앞에서 계속 반복되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특히 그것이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고 성향과 맞을 경우는 더욱 그렇다. 하물며 수없이 많은 본보기가 끊임없이 우리 앞에서 반복될 경우 그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하겠는가.”
이 넓은 길에는 무례하고 야만적인 사람만이 아니라,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멸망의 길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숫자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주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상류층이고, 지혜로우며,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고, 지식과 깊고 다양한 학식이 있으며, 이성적이고, 언변을 가진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넓은 길이 옳고, 다수를 따르는 사람은 잘못될 수 없으니 그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며, 당신의 길은 협착해 찾는 자가 적으므로 잘못된 길이라고 설득하는 것이” 쉬운 일이다. 그들은 “악이 선이고 선이 악이며, 거룩함의 길은 파멸의 길이고 세상의 길이 천국의 길이며”, 혹 천국의 길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세상에서는 규범과도 같은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멸망으로 향하는 넓은 길에는 “힘 있고 높고 권세 있는 자”가 많다. 그들은 논리나 이해가 아닌 능력과 두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약한 자들로 경외심을 갖게 한다. 멸망의 길에는 부자들도 있다. 그들의 생활 방식은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우리의 어리석은 욕망을 사로잡는다.”
이 모든 멸망의 길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서 힘없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유리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다고 말해온 것”을 어떻게 옹호해야 할지, “심지어 자신이 경험한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명으로 향하는 문을 향해 곧장 나아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좁은 길로 계속 걸어가는 사람은 더 적다. “당신은 끊임없이 넓은 길로 돌아가고 싶은 자연적 욕망에 이끌린다.”
10장 복음은 어떻게 율법을 재정의하는가?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첫 번째 방법은, 율법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음으로 전적으로 등한시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율법을 전혀 가르치지 않음으로 일거에 무용하게 만드는 설교자에게서 발견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율법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명목으로” 복음과 율법 모두를 위태롭게 한다. 그들은 그런 행동을 통해 자신이 “산 믿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자”며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사도 바울만큼 율법을 많이 가르친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 율법을 가르치지 않는 곳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르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즉 그분의 모든 약속과 경고와 명령, 그분의 책인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어떻게 율법을 무용하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설교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설교하는 것, 그 결과 율법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율법뿐 아니라 복음까지 헛되게 만든다.”
율법을 무용하게 하는 두 번째 방법은, 신자를 하나님의 은혜에 진지하게 응답해야 할 의무에서 면제시켜주는 방식으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믿음이 거룩함에 대한 요구를 면하게 한다는 생각은 셀 수 없이 많은 무분별함을 가져온다. 이 오류는 크게 세 가지 일반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1)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는 거룩함이 덜 필요하게 되었다거나, (2) 그 필요성의 정도가 낮아졌다거나, (3)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 믿는 사람에게는 거룩함이 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세 경우 모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방종해도 되는 자유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