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씻기를 마치고 세 사람은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이와이와 사토는 소년의 배에다 갈색 베타딘을 발라 소독한 뒤 선명한 녹색 천을 덮어씌웠다. 천의 한가운데에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어서 소년의 복부만이 드러났다. 그 순간부터 소년은 얼굴도 팔다리도,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가족도 친구도, 그 인격조차 없는 그야말로 ‘복부’ 그 자체가 된다.
외과 의사에게 있어서 환자의 인격은 그 치료행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고 무슨 생각을 하며 누구를 사랑하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의 일부인 피부, 근육, 장기, 혈관, 신경, 조직을 대면할 뿐이다. 이 ‘천 가리개’는 그런 용도에 딱 맞는 아주 훌륭한 발명품이었다.
--- p.25
혼자 남겨진 류지는 회의실 불을 켜고 프로젝터와 스크린을 정리하며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BSC를 생각 중입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도대체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걸까. 94세라는 나이. 치매. 가족이 없다.
그러니까 그의 생존은 종료되어도 된다? 의료비가 전액 무료인 기초생활수급과 관련이 있는 걸까?
아니, 수술을 하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을 테고 적어도 입으로 밥을 먹을 수 있게는 될 것이다. 전혀 수를 쓰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수술을 하는 게 옳은지, 안 하는 게 옳은지.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수술하는 게 맞다. 하지만 사회 전체로 본다면 어떨까. 수술을 해서 그의 생명이 연장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사회 전체로 보면 부담만 증가할 뿐일까…….
류지로서는 알 수 없었다. 마음만 답답해진 류지는 회의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 pp.64-65
다행히 다쿠마는 발관 후 호흡과 혈압이 모두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다른 과의 중증환자가 ICU로 들어오게 되면서 ‘밀어내기’ 형식으로 일반병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병원에는 ICU 환자를 일반병동으로 옮길 때 반드시 의사가 동행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류지는 그 이유가 늘 궁금했다. 만약 의학적으로 의사가 동행하는 게 안전하기 때문이라면 의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 같은 햇병아리 인턴을 붙이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결국 인턴 인력을 ‘침대이송요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거겠지. 류지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침대이송’이라 하면 말은 쉬워 보이지만, 환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조심스럽게 밀어서 병원 안을 이동하는 것인 만큼 꽤나 힘든 일이었다. 이것도 나름의 기술이 필요했다. 아직 침대를 미는 데 능숙하지 못한 류지는 침대를 이리저리 벽에다 쿵쿵 박곤 했다. 과연 이날도 침대 돌리는 방향을 틀리고 말았다.
‘침대 미는 것도 제대로 못 하냐.’
그런 생각이 들자 류지는 자괴감이 들었다.
--- p.79
“아까 그 환자.”
카레를 다 먹고 나서 사토가 낡은 소파에 앉은 채 다리를 꼬았다.
“완전 티피컬한 환자라고.”
류지는 티피컬이라는 말을 듣고도 바로 전형적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지 않았다. 의미를 모른 채 그저 입을 다물고는 사토의 눈을 봤다. 그리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중년남성, 밤, 격통, 기왕력 있음. 이런 경우는 대개가 결석이야. 물론 다이섹션(대동맥박리) 같은 룰아웃은 필요하겠지만.”
류지는 다이섹션은 겨우 알아들었지만 룰아웃의 뜻은 몰랐다. 그렇다고 질문하면 또 혼날 것 같아서 겨우 “네”라고만 대답했다.
“뭐, 몇 명 진료하다 보면 알게 돼. 외과의라서 좋은 점은 수술하면서 요로를 직접 볼 수 있다는 거야. 이렇게 가는 관이 돌로 막히면 진짜 아프긴 하겠네, 하면서 눈으로 직접 보고 알 수 있거든.”
--- p.107
“청진기를 대면 좀 차가울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류지는 왼손으로 청진기를 감싸서 체온으로 덥혔다. 의대생 때 소아과 의사가 아이를 진찰할 때 하는 걸 보고 줄곧 그렇게 따라 하게 되었다.
아야의 배에 청진기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간단하게 두세 군데 톡톡 타진을 했다. 오른쪽 아래쯤에서 아야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이번엔 배를 만져볼게요.”
이번엔 아야의 배를 만지기 시작했다. 명치끝부터 시작해서 좌상, 좌하복부 순서로 만져나간다.
만지면서 2센티 정도 배가 들어가도록 꾹꾹 눌러간다.
“아픈 데가 있으면 말해주세요.”
처음에는 아프지 않은 곳부터 시작해서 점차 아픈 곳으로 교과서에 나온 촉진법에 따라 만져갔다.
--- p.111
내리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류지는 일단 그것을 간호사에게 건넸다.
“투 제로 실크(2-0 견사).”
사토가 말하자 간호사가 하얀 실을 사토에게 건넸다. 눈으로 좇아갈 수 없을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사토가 실을 묶고 “됐어”라고 말했다. 류지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켈리를 풀었다. 이번에는 맞았나 보다.
“나머지는 쓰리 제로 바이크릴로 근부를 쌈지 봉합한다. 쌈지 봉합해본 적 있어?”
“아니요, 아직 없습니다.”
“그럼 맨 처음 부분만 잠깐 해볼 테니까 잘 봐.”
사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장에 바늘을 찔렀다가 다시 빼냈다.
“이 정도의 위치에다 바늘을 깊게 찔러. 아뻬는 장이 흐물흐물하니까 확실한 데에 바늘을 찔러야지, 안 그러면 찢어지면서 재수술해야 할 수 있어.”
“네.”
그 후로는 무아지경이었다. 아무 생각도 안 들었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p.127
사망선고도 ‘사망’이라는 어엿한 진단이다. 절대 틀리면 안 된다. 사망선고는 의사에게만 허용된 진단행위로 환자에 대한 마지막 의료행위다. 그만큼 평소의 진료에 요구되는 정확성에 덧붙여 특별히 ‘존엄’이 더 요구되는 매우 특수한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럼 이걸 쓰세요.”
간호사는 류지에게 검고 굵은 펜라이트를 건넸다. 손으로 잡은 조금 낡은 그 펜라이트는 겉이 거칠면서도 묵직하니 무거웠다.
“그리고 이거요. 시계는 있으세요?”
“아, 아니요. 깜빡 놔두고 왔어요.”
간호사는 검은 청진기를 건넸다. 그리고 자기 명찰 쪽에 걸어 놓은 작은 시계를 류지에게 건넸다. 곰돌이 캐릭터 얼굴이 그려진, 어린 여자아이가 가지고 있을 법한 시계였다.
--- 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