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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520쪽 | 148*210*35mm
ISBN13 9791136531834
ISBN10 113653183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몽환.
꿈과 환상.
보이되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눈을 감고 있을 때 더 선연한 그것.
눈을 뜨면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져 버리는 무엇.
눈앞의 남자를 단 두 글자로 설명해야 한다면 아마도 이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퇴폐와 타락, 관능과 권능, 무심과 무아, 몇몇 말이 더 떠올랐으나 역시 그만큼 절묘하고도 완벽하게 그를 그려내는 단어는 없다.
정확한 나이는 가늠하기 힘들다. 위태위태한 열아홉이라 해도, 무르녹은 스물아홉이라 해도, 짙디짙은 서른아홉이라 해도 수긍할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것.
푸르도록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 시리도록 흰 얼굴은 달을 닮았다. 차오른 달보다는 이지러진 달에 가깝다. 깊은 밤과 새벽에 차게 머물다 사라지는 달.
그 아래, 한 번 마주치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눈이 있다.
그 눈이 몇 시간째 여자의 은밀한 곳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베드에 누운 여자 옆에 의자를 놓고 앉은 남자는 두 손을 모두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왼손은 골반 아래를 지그시 누르고, 오른손에는 길쭉한 은빛 머신을 들었다.
타다다닥, 타다다닥.
무감하게 튀는 소리를 따라 머신의 바늘이 쉴 새 없이 여자의 살을 뚫어댄다. 붉은 피가 배어 오르고 새까만 잉크가 뻑뻑하니 채워진다. 그의 왼손이 기계적으로 피를 닦아내고, 선을 확인하고, 다시 바늘을 박아 넣는다. 피와 잉크가 검붉게 뒤섞이며 치밀하게 엉켜든 장미넝쿨이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
여자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여기 들어와 눕는 순간부터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정신이 몽롱해지니 감각마저 둔해져 통증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무신경해 보이고 싶지 않아 기를 쓰고 버티던 여자는 잠도 깰 겸 말을 붙였다.
“혹시 이름이, 아로?”
대문 앞에 [타투숍 아로]라 적혀 있던 것을 떠올리고 그렇게 묻자, 여자의 하체를 점령하고 있던 그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흔히 삼백안이라 부르는, 검은자가 위 눈꺼풀에 살짝 가려져 있는 눈이다. 길게 뻗은 눈꼬리 덕에 더욱 나른한 빛을 띠었다.
“아뇨.”
“이름, 알려줘요.”
“나중에.”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입술 끝에 가느다란 담배 같은 것을 물고 있어 말끝이 뭉개지는 것마저도 지독하게 잘 어울렸다.
이걸 다 하고 나서 이름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내리라. 여자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지금 그녀의 아래에 걸쳐져 있는 거라곤 아슬아슬한 끈 팬티가 다였다. 배꼽 옆에서부터 골반을 지나 허벅지까지 이어지는 타투를 새기기 위해 과감히 미니스커트를 올리고 살을 내맡겼다.
“얼마나 남았어요?”
“10분 정도.”
다시금 머신 소리가 작업실 안을 울렸다.
여자는 제가 누운 공간을 휘 둘러보았다. 넓지 않은 복층 구조의 공간은 정갈하고 다소 어두웠다. 짙은 회색으로 칠한 벽에는 타투 도안들이 붙어 있고, 베드 주위에는 장비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외에 사람 사는 곳에 있을 법한 물건들은 거의 없어 보였다. 주방 쪽에도 장식인지 뭔지 모를 흰색 다구(茶具)가 놓여 있는 게 다였다. 밥 대신 차를 마시고 사는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여자는 그의 입술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분명 담배 같은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냄새뿐만 아니라 재도 떨어지지 않았다. 중간에 바꿔 물 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줄곧 찬찬히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궁금해진 그녀가 물으려는 찰나,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금방 끝나니까 눈 감고 있어요.”
마치 주문 같았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끝.”
머신 소리가 뚝 그쳤다. 놀라 눈을 뜬 여자가 당황하며 일어나 앉았다.
허벅지에 바늘로 그린 그림은 언뜻 머리끝이 쭈뼛해질 만큼 기괴했다. 어딘가 음란해 보이기까지 했다. 팽팽하게 부풀어 솟은 뱀의 몸통에는 가시가 돋아 있고, 새빨간 꽃잎 사이로 미끈한 뱀의 혀가 박혀 있는 광경은 흡사 뱀과 장미의 교접을 연상시켰다.
“마음에 드네.”
낮은 속삭임, 그리고 제 허벅지 위로 미끄러지는 남자의 시선에 뱃속이 저릿해진 여자는 스커트를 내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물었다.
“내가 마지막 손님인가요?”
머신을 내려놓고 주변에 묻은 잉크들을 닦아낸 남자가 고개를 까닥하고는 장갑을 벗었다. 보통 남자들보다 한 마디쯤 길어 보이는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진득하니 들러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빙글 몸을 돌린 여자가 베드 아래로 다리를 내리며 다가앉았다. 남자는 물고 있던 것을 빼서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옆에 놓인 바셀린 통을 집어 들었다.
“일 끝나면 뭐 해요?”
“하고 싶은 일.”
번들거리는 손가락이 붉게 부어오른 장미 위를 문질렀다. 끈적한 바셀린이 녹아 짓뭉개지며 꽃잎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뭘 하고 싶은데요?”
“글쎄.”
허벅지 위를 배회하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스커트 안으로 미끄러졌다.
“……같은 거?”
야릇하게 비틀린 입술이 노골적인 단어를 흘려낸 순간,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여자의 안을 깊숙이 휘저었다.
쓰러지듯 몸을 굽힌 여자가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입술이 포개졌다가 벌어지며 두 개의 혀가 섞여들었다.
격렬하게 뒤엉키는 와중, 여자가 남자의 위로 몸을 내렸다. 다리가 벌어지며 핏빛 넝쿨이 남자의 몸에 휘감겼다. 열기가 몰려 단단해진 하체가 맞닿고, 젖은 살갗 사이로 뜨겁고 묵직한 것이 단숨에 파고들었다.
“흐윽, 아……!”
커다란 손에 허리를 붙잡힌 채 흔들리는 여자의 입에서 교성이 터졌다. 게걸스레 빨아대며 더욱 매달려 보아도 타는 듯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속이 달뜨고 눈앞이 어찔거렸다. 도저히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아주 자극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끝.”
놀라 눈을 뜬 여자가 당황하며 일어나 앉았다. 그새 깜박 잠이 들었었나 보다.
여자는 제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바늘로 그린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한 흑백의 장미넝쿨이 새겨져 있다.
“피곤했나 봐요, 잠깐 사이에 깊이 잠든 걸 보니.”
“그, 그러게요. 죄송해요. 원래 아무 데서나 막 자는 타입은 아닌데…….”
“꿈까지 꾸는 것 같던데.”
머쓱해진 여자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전혀 떠오르는 게 없는데 머리가 띵하고 괜스레 얼굴이 홧홧했다.
“기억이…… 안 나네요.”
“기억 안 나는 꿈이 좋은 꿈이라는 말이 있죠.”
장갑을 벗은 남자가 완성된 타투 위에 바셀린을 발라 주었다. 아까까지 물고 있던 담배는 언제 껐는지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바늘을 박아 넣을 때도 둔탁한 통증만 느껴지던 살이 새삼 화끈대며 쓰렸다.
베드 주변과 도구를 가지런히 정리하는 그를 흘끔대던 여자는 옷자락을 가다듬고 내려섰다.
“내가 마지막 손님인가요?”
“네.”
“일 끝나면 뭐 해요?”
“쉬어요. 하나 할 때마다 꽤 집중하는 편이라서.”
“직업정신이 투철하시네요. 어쩐지 상담받을 때부터 신뢰가 가더라니. 그래도 저녁 정도는 드시겠죠?”
고개를 든 남자는 엷게 웃었다.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배불러요.”
처음으로 그의 미소와 마주한 여자는 자디잔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는 한 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몇 시간 동안 작업해 놓고 먹은 지 얼마 안 됐다니, 어처구니없을 만큼 노골적인 거절이었으나 불쾌해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었다.
시린 얼굴 위에 톡 떨어졌다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미소 한 조각이 너무 달콤해서.
“한 달 후에 리터치 예약하고 와요.”
여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핑계를 대서든 이 남자를 다시 보고 싶다.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오래.
“리터치 전에 다른 타투를 또 하고 싶은데, 제일 빨리 가능한 날짜가 언제죠?”
“너무 크지 않은 거라면 내일도 가능해요.”
“그럼 내일 오후에 또 올게요.”
“어디에 어떻게 그릴 건지?”
“가슴에. 속옷 입으면 가려졌다가 벗으면 보이는 위치는 어떤가요?”
비스듬히 고개를 튼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속옷 입으면 가려지는 데다 할 때는 거의 여자 타투이스트들을 찾던데. 나한테 맡겨도 괜찮겠어요?”
“타투는 한 번 새기면 쉽게 지울 수 없으니까 은밀한 부위건 어쨌건 남녀 상관없이 실력 있는 타투이스트를 찾아야 한다고 들었어요.”
두 번째 미소가 어렸다 사라졌다.
“마음에 드네.”
언젠가 들어본 속삭임 같다는 생각이 스쳤고,
“하긴, 나랑 이미 한 번 했으니까.”
기분이 묘해졌다.
남자가 일어섰다. 의자 아래에서 메마르고 뻑뻑한 소리가 났다.
“다시 누워봐요. 옷 벗고.”
베드에 걸터앉은 여자는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누운 후에 한쪽 브라 끈을 어깨까지 내렸다.
“도안은 어떤 걸로?”
“저한테 어울릴 만한 걸로 추천해 주세요.”
“좀 볼게요. 사람마다 몸의 굴곡이 달라서.”
옆에 놓인 펜을 들고 다가선 남자의 손이 브라 컵을 끌어 내렸다. 의사가 촉진하듯 무미건조한 손길이었으나, 여자의 발끝에는 움찔 힘이 들어갔다.
“근데 여기 되게 아플 거예요. 꼬집고 할퀴고 깨물어 씹는 것 같을 텐데. 참을 수 있겠어요?”
“참을 수…… 있어요.”
짙은 눈동자가 피부 위를 감돌며 그림의 위치를 가늠했다. 남자는 고개를 바짝 숙이고 능숙한 솜씨로 선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서걱대는 침묵 속, 여자는 눈을 질끈 감고 후회했다. 조금도 자극받지 않은 남자 앞에서 저만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꼴이라니, 뒤늦게 자존심이 상했다.
“긴장하지 마요.”
말끝에 따라 나온 숨결이 피부 위를 스쳤다. 수치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몸은 눈치도 없이 더 달아오르기만 했다.
“나한테 손님 몸은 지우개 없이 그림을 그려야 하는 도화지일 뿐이라서…….”
남자의 말이 조금씩 느려지고 낮아지더니 속삭임이 되었다.
“아무리 보고 만져도 안 서.”
덜컥, 숨이 막혔다.
“나랑 다른 거 하고 싶으면 타투는 안 받는 게 좋아요. 보기보다 직업정신이 투철하거든.”
머리며 몸이 비로소 차게 식었다. 여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끝.”
황급히 일어나 앉은 여자의 가슴에 기괴한 뱀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벌린 입안에 자리한 유두는 금단의 열매처럼 탐스러워 보였다. 정말 물릴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그 뱀이 꿈틀하고 움직인 듯한 착각이 스쳤다.
“흐읍……!”
“내일, 할래요?”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두려웠다. 알 수 없는 오싹함이 등줄기를 훑어, 여자는 앞섶을 여미고 급히 내려섰다.
“아니, 아니에요. 조금…… 좀 더 생각해 보고 올게요.”
서둘러 겉옷과 가방을 챙긴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갔다.
불안한 구두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던 남자가 들고 있던 펜을 뒤로 던졌다. 돌아보지도 않고 한마디 했다.
“거기 놓아두렴.”
“예.”
분명 아무도 없던 자리에서 공손한 대답이 들려왔다. 언제 어디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받아 든 펜을 타투머신 옆에 가지런히 놓고는 고개를 숙였다.
“제2좌 무야, 하현 님을 뵙습니다.”
맥족(/?(한자 깨짐 확인할 것!!/族)의 12제후 중 제1좌, 하현.
인간의 꿈을 먹고사는 환수. 맥의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고 종족을 수호하는 열두 명의 남자를 제후라 불렀다. 그들 중 일부는 환계에서 왕을 호위했고, 나머지는 인계에 머물며 사냥을 했다. 왕에게 바칠 꿈과, 그들을 노리는 다른 환수들을.
오랜만에 제 위치를 자각한 하현이 고개를 까닥했다. 그제야 무야는 허리를 폈다.
“무슨 일이지?”
“왕께서 대맥궁(大/?/宮)에 머무는 제후들도 반만 남고 나머지는 여우를 추적하는 데 힘쓰라 하셨습니다. 하여 잉태일이 될 때까지 인계에 머물러야 할 듯합니다.”
“어디에 있으려고?”
“그야 이 동네지요. 1좌께서 여기 계시는데 제가 달리 어딜 가겠습니까?”
하현이 핀잔하듯 코끝으로 웃었다. 덩달아 빙긋 웃은 무야가 주머니에서 [찻집 단꿈]이라 적힌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아무튼, 이왕 내려온 거 제대로 머물러 보고자 가게 하나 차렸습니다.”
“갖출 건 다 갖췄구나. 하긴, 예나 지금이나 네가 인간 흉내는 잘 내긴 했지.”
“이제는 1좌께서 더 잘 내시는 것 같…….”
하현이 스윽 눈을 들었다. 그저 마주쳤을 뿐인데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시선에 무야가 냉큼 말을 돌렸다.
“동백이는 어디 갔습니까?”
“이 골목 어딘가에 있겠지.”
“한동안 못 봤더니 궁금하네요. 어찌 자랐는지.”
“딱히 자라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여전히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하하.”
“걸핏하면 싸돌아다니면서도 심심해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인데, 네가 오면 갈 곳이 더 생겼다고 좋아하겠구나.”
무던한 목소리 안에 미미한 정 같은 것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무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가 알던 1좌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아니지. 원래부터 아무 때나 성정을 드러내시는 분은 아니었어.’
무야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용케 3년씩이나 거두셨네요. 아무리 천휼 님의 부탁이라 해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라 금방 손을 떼실 줄 알았습니다.”
“귀찮긴 한데, 어쩌겠어.”
그가 정말 귀찮은 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무야는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조만간 같이 오십시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현이 고개를 까닥했다. 곧 길쭉한 실루엣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무야가 우려내는 차향을 떠올리자 벌써부터 흡족해졌다. 하현은 가느다란 담배처럼 생긴 미몽(迷夢)을 꺼내어 입에 물고는 눈을 감았다.
“벌써 3년이 됐나…….”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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