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불교란 ‘붓다의 가르침’을 뜻하는 말인데, 무얼 가르친다는 것인가? 고(苦)·집(集)·멸(滅)·도(道) 네 가지 진리를 가르친다. 이 네 가지를 가르치는 데 무슨 말을 그리도 많이 했기에 ‘팔만대장경’이니 ‘팔만사천법문’이니 하는가? 당연히 ‘팔만’이라는 숫자는 무수히 많다는 뜻일 텐데, 왜 가르침이 그토록 많은 것인가? 궁극의 진리는 하나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무수히 많고 중생들의 근기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를 달리 불도(佛道)라고도 한다. 그것은 ‘붓다의 길’이면서 ‘붓다가 되는 길’이다. 이미 싯다르타 고타마가 출가해서 갖가지 수행을 거쳐 깨달음에 이른 길이기도 하지만, 그를 본받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무수한 중생이 또한 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길,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불교는 붓다와 중생 사이에 놓인 길이면서 그 둘을 이어주는 다리이기도 하니, 불교(佛橋)라 말해도 되겠다.
참으로 붓다가 되고자 하는 이라면 복되다 말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붓다가 자비심으로 무수히 많은 길을 펼쳐 놓고 다리를 놓아두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화엄경』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는 것, 이를 초발심(初發心)이라 한다”라고 하고 또 “초발심을 내면 곧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깨닫겠다는 마음만 낸다면 깨달음을 얻는 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일단 기뻐하고 볼 일이다. 그러나 곧 의문이 든다.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데, 어찌 그 많은 길을 열고 다리를 놓으셨을까?
다시 『화엄경』으로 돌아가면 맞닥뜨리게 되는 대목이 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초발심으로부터 보살행을 닦으시고 으뜸가는 정각(正覺)을 이루셨다.” 그렇다, 보살행을 닦아야 정각을 이루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길은 있으나, 그 길을 닦아야 하는 이는 낱낱의 중생들이다. 붓다가 닦는 일은 없다. 닦는 일이 없어 붓다 아닌가. 다리가 있으나, 그 다리를 건너야 하는 이 또한 낱낱의 중생들이다. 붓다가 건널 일은 없다. 이미 건넜으므로.
우리가 불교경전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전마다 갖가지 길을 담고 있고, 경전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갈 다리를 품고 있다. 그런데 그 길을 가고 그 다리를 건너야겠는데, 경전 속에 길도 다리도 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어서 찾아보고 싶은데, 통 보이지 않는다. 청맹과니 중생이라서 그렇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지당한 말이다. 아뿔싸, 어쩔거나! 길은 있는데, 보이지 않으니.
붓다는 마흔아홉 해 동안 팔만사천법문을, 그리 많은 ‘법문(法門)’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그리고 붓다가 열반에 드신 뒤에 그 제자들이 법문이라고 푯말까지 떡 하니 세워 두었는데, 이 중생들은 그 문을 들어서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도무지 찾지를 못하고 있으니, 쯧쯧! 그러니, 어디 길이 있다 한들 한 발짝이나 내디딜 수 있겠는가? 다리가 있다 한들 무지개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 법문을 밀치고 들어가려면, 읽고 이해하고 깨닫는 눈이 있어야 한다.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오래 전부터 맞닥뜨린 법문은 ‘한문(漢文)’으로 세워져 있었다. 옛날에도 그 한문을 제법 터득한 이라야 법문을 밀칠 깜냥이나 되었다. 하물며 오늘날에야! 물론 이제는 주요한 많은 경전들이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굳이 한문을 익힐 까닭이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이가 있으리라. 과연 잘 된 번역이 얼마나 될까? 설령 잘 된 번역이 있다 한들 그것으로 충분할까? 번역은 끝없이 새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완벽한 번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면 그 시대에 맞는 번역이 또 필요하기에.
한문으로 단단하게 봉해진 법문을 밀치고 들어설 이는 옛날에도 적었고, 오늘날에도 적다. 앞으로는 더욱 적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 적은 사람이 한문을 익히지 않은 대중을 위해 이 법문을 제대로 밀어서 열어 두어야(번역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한문을 제대로 익히는 것이 선결요건이다. 그러나 그저 익혀서 될 일은 또 아니다. 그 오묘한 이치를 풀어 밝힐 수 있도록, 즉 온전히 해석할 수 있도록 익혀야 한다. 그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이른바 문법(文法)이다.
불교경전을 이루는 한문 즉 불교한문의 문법은 법문의 관건(關鍵)이다.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게 해 줄 열쇠다. 우리나라에는 이제까지 이런 열쇠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제는 필요하다. 더 이상 한문의 시대도 아니고, 또 그저 백 번 읽으면 문리(文理)가 절로 트이리라는 요행을 바라는 것도 적절하지 않기에. 붓다의 가르침을 제대로 읽어내어 그 오묘한 이치의 맛이라도 느끼기 위해서는 이 열쇠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한다.
이제 여기 ‘불교한문 해석법’이라는 책을 내놓으니, 독자들께서는 법문을 열어줄 열쇠쯤으로 여겨주신다면 고맙겠다. 물론 이 책으로 충분하지 않을 줄 안다. 빠진 것도 적지 않을 것이고, 잘못 쓴 부분도 있을 것이다. 번역이나 해석에서도 착오가 있으리라. 눈 밝은 독자의 따끔한 지적과 질책을 기대한다.
20대에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불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 또 유교와 불교의 고전 몇 권을 번역하면서도 ‘한문 문법’에 대한 책을 쓸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내 전공도 아닐뿐더러 능력도 모자라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10여 년 전, 민족사 윤창화 대표께서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윤창화 대표는 불교한문을 독해하기 위한 문법서가 필요하다며 일본 학자의 책을 번역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 책을 읽어본 뒤에 나는 굳이 번역하는 것보다는 내가 쓰겠다는 말을, 겁도 없이 입 밖에 냈다. 그 까닭은 그 책이 『법화경』을 중심으로 문법을 다루었고, 어순에 대한 것 외에는 문법적 내용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어서였다. 한국의 독자들이 즐겨 읽는 여러 경전들을 자료로 삼을 필요도 있고, 문법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제시할 필요도 있어서였다. 이런 내 생각을 윤창화 대표는 흔쾌히 받아주셨다.
그런데 그게 참으로 겁이 없는 말이었다. 작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체재나 구성을 어떻게 할지, 어떤 경전들을 중시할 것인지, 논서와 어록도 다룰지 말지 따위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 능력이었지만. 그 와중에 또
이미 시작한 다른 작업들, 예정된 작업들이 있어서 이 책은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무늬만 불자가 염불하듯이 “책을 써야 하는데! 책을 써야 하는데!”라는 염서(念書)만 띄엄띄엄 했다고나 할까. 그러다 훌쩍 10년이 지났다. 더 늦출 수 없었고, 너무 염치없는 꼴이 되었다.
그나마 이렇게 해를 넘기지 않고 끝낼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그 동안 아무런 채근도 하지 않고 기다려주신 윤창화 대표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린다. 또 이 책이 제 꼴을 갖추도록 애써주신 민족사 편집부에도 감사드린다.
2019년 12월 금정산 자락 삼매당(三昧堂)에서
야매(野昧) 정천구 쓰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