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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잠

숲과 잠

리뷰 총점9.8 리뷰 8건 | 판매지수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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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 top100 3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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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5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28쪽 | 310g | 130*188*20mm
ISBN13 9791197061301
ISBN10 119706130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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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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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우리가 들이쉬는 숨 속에는 숲 냄새가 가득했다. 눈 두는 어느 곳이나 싱싱한 초록이었다. 우리는 물속을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파도치는 푸른 공기 속을 걸었다. 눈이 부셔 실눈을 한 채로.
--- p.13

언젠가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 나무와 꽃과 풀이 저마다의 생명력으로 자라나 작은 숲을 이루는 마당에 아침마다 찾아오는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텃밭에서 자란 채소들로 간소한 식탁을 차리고 이따금 반가운 이가 멀리서 찾아오면 차를 끓이고 앵두와 석류를 나눠먹고 그 친구는 내 사는 모습에 흉을 보거나 평가하는 일 없이 마당에서 노는 고양이를 함께 바라보다 이따금 웃는 사람이면 좋겠고 조금 아쉬워하며 산뜻하게 헤어지면 좋겠다. 밤이면 노곤하게 찾아드는 졸음에 미련 없이 읽던 책을 덮고 이런저런 걱정이나 두려움으로 뒤척이는 일 없이 순식간에 잠이 드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 p.25

그곳에 있는 동안 일상은 긴 산책과 짧은 산책으로 이어졌다. 냉장고에서 테이블로 옮겨져 녹기 시작한 버터처럼 부드럽고 상냥한 날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호수를 따라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책은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일로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리고 밤사이에 조금 딱딱해진 빵을 썬다. 달걀을 삶는 동안 좋은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은 호수 바로 옆에서 먹는 거다. 양 조절에 실패한 커피는 넘쳐흘렀지만 이상하게 자꾸 웃음이 났다.
--- p.33

마멀레이드, 크렘뷔를레, 미네스트로네, 포타주, 세비체, 샤르트뢰즈, 피낭시에, 셈라, 나타, 에그녹, 아니스 향과 클로브. 음식과 향료의 이름은 아름다운 노랫말 같다. 어릴 때 읽었던 책 증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상적인 장면은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먹는 장면이다. 하이디의 검은 빵과 흰 빵, 에이미가 책상 서랍 속에 숨겨놓고 몰래 먹던 라임절임, 라스무스의 청어튀김과 감자, 주디의 레몬젤리로 가득 채운 수영장. - 레몬젤리를 가득 채운 수영장에서는 뜰 것인가, 가라앉을 것인가에 대한 열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나는 가라앉을 거라는 주디의 의견에 한 표 던졌지만 그런 수영장이라면 가라앉아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 p.46

나는 평생 잠이 모자란 사람이었다. 택시를 타고 새벽 거리를 달려 집에 도착하고 나면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본능과 이대로 잘 수 없다는 묘한 결의가 쓸모없는 한판 승부를 펼쳤다. 내일에 대한 걱정과 오늘의 아쉬움이 팽팽히 등을 맞댄 채 시간은 속절없이 아침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하고 싶거나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다. 티비를 켜놓고 별 재미도 없는 걸 멍하니 바라보며 졸음을 꾸역꾸역 참다 결국은 소파 위에서 잠들곤 했다. 어제와 내일의 구별이 없는 밤이었다. 오늘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뱅골어로는 어제와 내일을 가리키는 말이 똑같다고 들은 적 있다. 내가 보낸 어제가 나의 내일이 될 거라는 경고처럼 두렵게 하는 말이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는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하는 밤이 수없이 지나갔다. 그러지 않는 어느 밤에는 멀리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 p.70

시간과 시간 사이를 떠도는 유목민은 여행자의 집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깊은 잠에 빠진다. 시간을 거슬러온 탓에 하루 늦은, 혹은 하루 이른 잠에 든다. 어쩌면 어딘가에 흘린 잠의 조각을 맞추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걷고 몸을 움직여 녹초가 되어 저녁을 먹을 무렵에는 이미 졸기 시작하고 식사에 곁들인 와인이나 맥주의 첫 잔이 비고 나면 깨끗이 항복하고 여행이란 이름의 수면제 한 알을 삼키고 꿈도 꾸지 않는 잠에 빠져든다.
--- p.74

오후 세 시 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고 무엇을 시작하기에도 좋은 시각이다. 무엇을 해볼까 하고 생각하다 그만 두기에도 적절한 시각이다. 자취 없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 그 시간 동안 나는 안달루시아의 하얗게 바랜 마을에서 시에스타를 즐기고 로스트레이크 주변을 산책하며 낮은 소리로 허밍을 하고 집근처 산책로를 거닐다 오기도 한다. 백일몽을 꾸기에도 좋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좋다, 그런 시간에는. 지나가는 것, 어슴푸레한 것, 고요하게 비어있는 것,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 것 같고 종종 호텔에 묵는 동안 그런 기분이 들곤 한다.
--- p.80

나는 밤에만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작은 발코니가 있는 부엌에서 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는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낸다. 오렌지와 사과, 레몬즙, 클로브와 시나몬. 사향과 자작나무, 여름의 볕과 야생화, 딸기와 버섯, 호수와 열기, 전나무와 눈의 냄새. 뜨겁고 달콤한 와인에서는 단잠과 눈물 맛이 나고 밤새 나는 몇 장의 책을 읽고 몇 줄의 글을 적은 뒤 선반에서 접시와 빛을 잃은 은수저를 꺼내 닦은 뒤 종이로 싸고 스웨터를 접어 트렁크에 넣으며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직 밤은 깊고 숲의 기척이 가만히 느껴진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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