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툭. 인우가 펜을 내려놓다 시선을 내렸다. 하얀 종이에 잠깐 닿은 것뿐인데도 검게 번지는 흔적이 어쩌면 제 마음 같기도 했다.
“……이혼해드리려구요.”
쑥스러운지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지만, 음성은 작아도 또렷했다. 그래서인지 며칠이 지나서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이혼, 이혼이라.
생소하기 짝이 없다. 하긴. 결혼도 그런 식으로 했으니 이혼이라고 별다를 게 있겠냐마는, 해인의 입에서 나온 말인 이상 흘려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뭔가 어색했다. 사실 제가 기분이 나쁠 만한 이유는 없다. 처음부터 형식적인 결혼이었고 서로가 원하던 바를 얻었으니, 이쯤에서 정리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는 해인은 이혼이란 말을 입에 담을 만한 아이가 아니었던지라 이질감이 들었다. 아이들이 사탕을 조르고 강아지들이 무의미하게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그의 머릿속에 있는 해인은 할 만한 말과 행동이 정해져 있는 존재였다.
“……저요? 저 부르셨어요?”
따뜻한 코코아 잔을 잡으면 잠시 눈을 감고 웃거나, 그를 못 본 척 굴다 그가 부르면 놀라 눈을 깜빡이거나.
그런 아이였다. 아무리 몇 년이 흘렀다지만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인데. 적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이혼해드리려구요.’라는 말을 할 애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왜?”
굳이 이유를 물어본 것은.
“아……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더는 예전처럼 다니기 힘드실지도 모르니까, 제가 먼저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서…… 그래서…….”
마치 그를 배려해준다는 듯한 투였다. 실제로 제가 아는 해인이라면 그 이유가 전부였겠지만, 묘하게 거슬렸다. 그리고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오빠 온다고 뉴스에서 봤거든요. 그래서 혹시 여기 오면 볼 수 있을까 했는데…… 정말로 만날 줄은 몰랐어요.”
“…….”
“지, 진짜 여기 오실 줄이야.”
이왕 말하는 거 당당하게 굴 것이지, 연신 머리칼을 넘기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던져본 낚싯대에 고기가 걸린 듯, 어쩔 줄 모르고 눈만 깜빡이는 해인이 마냥 우스웠다. 정말로 그냥 한번 들러본 거였으려나. 사람의 모든 행동엔 이유나 속셈이 있다 믿어온 인우였지만, 그 순간엔 그리 믿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제일 의아해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그러니까 제 말은, 결혼도 했으니 이제는…… 이혼해드리려구요.”
이게 어법에 맞는 소리인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살인적인 일정 중에도 간간이 의문을 떠올렸다. 주로 지겨운 상대와 마주 앉아 있거나, 살얼음판 같은 회의실에 앉아 있을 때 그러했다.
공부를 꽤 잘했다고 들었는데. 어법에도 안 맞는 말을 한 해인이 이상한 건지, 그런 애를 합격시켜준 대학교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굳이 그걸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한 건지 모를 일이다.
“고얀 놈, 기어이 내가 여기까지 와야 하느냐!”
문이 벌컥 열리자, 인우가 조용히 일어났다. 전무까지 된 그의 방에 멋대로 들이닥칠 이라면 둘 중 하나다. 그가 이 자리에 앉은 것이 불만스러운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를 이 자리에 앉힌 사람이거나.
“오셨습니까, 회장님.”
“곧 죽어도 회장님이라지. 하여튼 고집이 제 애비랑 똑 닮아선.”
쯔쯧, 혀를 찬 강석재 회장이 전무이사실부터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원래부터가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지만, 인우의 방을 뜯어보는 시선은 평소보다 한층 더 깐깐했다. 크기가 작네 크네, 장식품이 적네 마네, 별걸 다 지적하더니 마지막에야 인우를 흘겼다.
“그래, 그러고 보니 너도 말이다.”
“그냥 처음부터 저한테 뭐라셔도 상관없습니다, 회장님.”
“하여튼 이…….”
강 회장은 눈 하나 깜빡 않는 인우를 보며 반백의 눈썹을 세웠다. 할 말이 있으면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뜻이겠지만, 그런 걸로 치자면 이쪽도 할 말이 많다.
“너야말로 무슨 생각을 하느라 대놓고 틈을 보였느냐.”
“…….”
“흥, 다 잘하는 줄 알았더니 시치미는 못 떼는구나.”
강 회장은 만족스레 웃으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당황한 손자를 놀리기엔 녀석이 얼마나 바쁜지 익히 아는 바다.
“정신없겠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계속 이럴 게다. 지켜보는 눈도 많고. 뭐, 앞으로는 더 많아지겠지만.”
“그렇군요.”
“그러니…… 정리할 일은 미리미리 정리해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
“…….”
강 회장의 의미심장한 시선에 인우가 턱을 들었다. 오만한 느낌을 주는 예리한 턱선이 강 회장의 젊은 시절과 닮은 구석이 많다.
“하고픈 말은 곧장 하셔도 된다 말씀드렸습니다만.”
“얼굴도 모르는 내 손자며느리 말이다.”
“그게 벌써 회장님 귀에까지 들어간 줄은 몰랐습니다.”
“내게 들어가라 일부러 흘린 것은 아니고?”
조 비서는 강 회장이 직접 발탁해 인우에게 붙여준 수족이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우가 스스럼없이 그런 소릴 했다면 이 정도는 예상하고도 남았단 뜻이다.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던 건 아니고요?”
“아니라곤 안 하마.”
인우에 대해서라면 그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샅샅이 파헤친 강 회장이다. 본론이 나온 만큼 그도 보다 직설적으로 나섰다.
“그 아가씨 아버지가 네가 다니던 대학 교수였다지?”
“…….”
“미성년자인 딸을 네게 맡길 정도라면 꽤 신뢰가 두터웠던 모양이구나. 뭐, 네가 누군지 알아봤을지도 모르겠고.”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분께 말씀 삼가시지요.”
그나마 강 회장 앞에서는 잠잠하던 인우의 눈초리에 거침없이 날이 섰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강 회장이 슬며시 입가를 늘였다.
“네가 편들어주는 사람도 다 있고, 별일이구나.”
“교수님께는 빚이 많으니까요.”
“그 덕에 네 호적까지 내어주지 않았느냐?”
“……그 정도가 별 의미 있겠습니까.”
‘그 정도가’라고 했지만 실상 ‘그따위가’와 다를 바가 없다.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생아로 났으니 어쩌다 서류를 제출해야 할 때면 누구든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곤 했었다. 티를 내지 않아야 한다 마음먹었다 해서, 그리 쉽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얇은 종잇장 하나로는 가려지지 않는 억지웃음은 워낙 익숙해 상처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씩 웃어주던 송 교수님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때에는 서로가 상대에게 어떠한 관계가 될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그분껜 그보다 더한 것도 내어드렸을 겁니다.”
“……모두 과거의 일 아니냐. 그리고 네 덕에 딸이 남은 재산을 지켰으니 그 양반도 손해는 아니었을 테고.”
“…….”
“네가 태원에 자리를 잡기로 한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좋을 것 없지 않겠느냐.”
강 회장에게 결론은 하나였다. 그는 손가락을 맞물려 깍지를 낀 채 이렇다 할 대답이 없는 인우를 응시했다.
“자칫 언론이나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너뿐 아니라 그 아가씨도 혼란스러워질 게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그건 너도 싫겠지.”
“……해인이는 그리 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인우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여태까지는 그저 남의 일처럼 무심했다면 이제는 싸늘했다. 선을 긋는 듯한 인우의 눈동자가 더욱 또렷해졌다.
“회장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야 당연히 이혼을 해야지.”
“…….”
“금전적으로는 별 부족함이 없는 것 같던데, 뭘 해줘야 적당히 물러날지 생각 중이다. 인우 너는 따로 해주고 싶은 것이 있느냐?”
“글쎄요.”
강 회장의 거침없는 요구만큼이나 인우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 전에 저도 회장님께 하나 여쭤보고 싶군요.”
“말해보거라.”
“제 이혼에 그리 관심을 쏟으시는 것이 정말로 해인이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태원 그룹에 해가 될까 우려하셔서인지 궁금하군요.”
“글쎄.”
“…….”
“어느 것이든 너를 움직일 수 있다면야 무슨 상관이겠느냐.”
피식. 느긋하게 기대어 있는 강 회장의 미소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어두웠다. 그 오랜 세월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가 자리를 지켜왔다면 보통의 도덕심은 버렸다는 소리다.
이로써 인우가 할 수 있는 결정도 더욱 굳건해졌다.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약점이라면 끊어내는 것이 순리다.
“그러시군요. 그 뜻은 잘 알겠습니다.”
“이왕이면 좋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거니 언짢게 생각지 말거라.”
“그러기엔 한발 늦으셨군요. 이 결혼을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서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혹시 인우 네가 미리…….”
“아니요, 저도 차였습니다.”
“…….”
“도착하자마자요.”
제 할 말을 모두 마친 인우가 서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코트까지 팔에 걸친 그가 입을 떡 벌린 채 앉아 있는 강 회장의 앞에 섰다.
“모든 선택을 꼭 회장님이 먼저 하실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그럼 그 아가씨가.”
“그러니 앞으로 나설 기회가 없더라도,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마십시오.”
여기까지만입니다. 눈빛이든 말이든 이만하면 분명한 경고를 한 셈이다. 아마 강 회장도 앞으론 그녀의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담지는 못할 것이다.
“…….”
그런데도 검은 카펫 위를 걸어가던 인우가 어느 순간 못마땅한 듯 멈춰 섰다. 조각상같이 반듯하기만 하던 옆모습도 꽤나 심각해졌다.
강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가 어떤 소릴 하든 놀라거나 당황할 것은 없다.
“아무래도 결혼을 했으니…… 이혼해드리는 게 맞는 거 같아서요.”
그래, 사람을 당황하게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이미 해인의 수줍은 듯 어법에도 안 맞는 말을 듣던 순간에 겪을 만큼 겪었다. 한참 후에야 나왔던 자신의 대답이 어땠는지 떠올려보면 더욱 그러했다.
“……그럼 그러든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