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 담장을 타고 넘는 칡덩굴과 줄다리기를 하거나 키가 나만큼 높이 커버린 명아주의 뿌리를 캐느라 얼굴이 자주 달아오르곤 했다. 자연은 고요하지만, 그 세력은 거대하고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저들의 생명력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느새 담벽 너머 옆집 앞마당까지 제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하고 몰입적인 생의 의지는 인간에게서는 본 적이 없었다.
--- p.54
베어지고 잘린 풀들에서 강한 풀 내음이 났다.
그것이 자기 혁명 아니고 무엇일까.
인간이 들을 수 없는 비명, 혹은, 혁명.
여린 것들의 생명은 쉬 죽지도 않고 다시 자라난다.
다시 잘려 나가더라도
생명은 무기보다 강하고 풀들은 나를 이긴다.
--- p.55
바람이 부는 오후
나는 바람이 분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무는 나 없이는 바람을 볼 수 없었을 거야. 내가 흔들리기 때문이지, 그러나 중요한 건 네가 여기 없으면 나도 ,바람도 볼 수 없겠지, 라고 말했다.
우리의 머리칼이 볼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지.
나무가 없다면 나는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을 거야.
나무도 나도,
우리에겐 우리가 간절했다.
--- p.81
명상
나는 오랫동안 명상을 해왔다. 몇 년 전부터는 가만히 정좌한 상태로 호흡하는 명상법이 아닌 주로 산책을 하거나, 산책을 하며 생각 없이 밤이의 걸음을 따라가거나 아니면 지나가며 나무들을 관찰하는 등의 명상을 하고 있다. 현실 속에서는 모니터 앞에서 일을 하거나, 글을 쓰는 명상을 하고, 집에 있을 때면 청소를 하거나 요리, 설거지를 하는 명상을 한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명상을 하기보다는 내가 하고 있는 일상을 명상한다.
--- p.90
수풀과 꽃잎이 일제히 몸을 밖으로 밀어내자 숲의 계보가 생겨난다. 시간의 단위가 계절로, 연속적이고 영속적으로 길어진다. 자세히 바라보면 떨어지는 풀잎과 이제 막 피어나려는 풀잎, 꽃 하나에 한 계절씩 피어난다. 한 잎 한 잎이 생명이라면 저 나무 한 그루엔 셀 수 없는 우주가 열려 있는 듯도 하다.
--- p.110
인간만이 금을 긋고, 풀들만이 금을 넘는다. 민들레 홀씨가 사방으로 날아가 뿌리를 내리며, 경계는 없다며 자유를 몸소 보여준다. 인간만이 스스로 경계를 만들고 경계에 갇히고 경계를 두려워한다. 모든 집이며 대지며 인간이 지나간 자리, 발길 닿는 곳마다 꼭 구역과 경계가 생긴다. 너의 것과 나의 것을 나누고, 내 편과 네 편, 의견의 장벽, 편견과 관념, 무수한 규율을 짓는다.
저 넓은 밤하늘 어디에도 경계는 없다. 지구라는 작은 별에서, 그 작은 별 속의 작은 나라에서, 모두가 분열과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다. 별빛이 숨 막히는 지구를 향해 깜빡 거리고 있다.
--- p.147
가만히 내 안에 불을 끄고 머문다. 어둡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나 홀로 서있다. 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혼자서 자신을 바라본다는 일은 누구에게나 여전히 낯설고 불편한 일일 것이다.
외부로 달려 나가는 감각을 안쪽으로 불러들인다. 동공을 안으로 돌리고 귀를 닫아본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 머문다. 깊이깊이 내게 닿는다. 수중 위로 끌어올리는 그물 같은 손길에 걸려들지 않고, 수면을 치는 바람의 유혹도 잠시 내려두고, 물속 깊은 곳으로 한동안 침잠한다.
홀로 사색하는 시간은 나를 만나는 것과 같다. 눈을 감고 바라볼 때면 희미하지만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 같다. 시각을 통해 들어온 외부의 장면들을 암실에서 현상하듯 바라본다.
--- p.162
지나고 보면 요동치는 감정이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이롭게 한다. 고이거나 내부로 썩지 않게 감정은 차오르고, 빠져나가고, 또다시 새로이 채우고, 흐르며 생명을 펌프질 하게 한다.
--- p.171
혼자만의 슬픔을 투쟁하지도 말 것이며
투정하지도 말 것이며
그대로 슬픔 속에 앉아 있어라.
피어날 때까지
그리고 일순간 폭죽처럼
활짝 피어나라.
--- p.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