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카치카 푸우. 입 안 가득 치약 거품을 물다 뱉은 후 물을 머금고 입 안을 헹구려는데 턱 밑으로 물이 줄줄 흘렀다. 놀라서 거울을 보았다. 입이 오므려지지 않아 그 사이로 물이 쪼르르 흐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다시 눈을 감아보았지만, 여전히 감기지 않는 눈에 오므려지지 않는 입. 가만 보니 입 모양을 ‘이’로 해 봐도 입술 왼쪽이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어 자는 언니를 깨웠다. 무작정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았다. 2007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 p.18
“야, 너 얼굴 지금 진짜 이상해. 왜 갑자기 그렇게 됐냐” “와, 슬기야, 너 웃을 때 이상해. 완전히 썩소네?” “헐, 신기해.”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마침 반에서 제일 짓궂은 남학생이 말했다. “야, 그럼 너 이제 장애인 된 거야?” 덜컥 겁이 났다. 바보 같이 눈물이 차올라 황급히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 p.36~37
귀에 걸어놓은 노란 고무줄 탓에 귀가 빨갛게 부어올라 가렵고 쓰려서 힘들었다. 할머니는 “우짜면 좋을꼬…” 하며 생각에 잠기시더니, 어느 날 노란 고무줄을 휴지로 칭칭 감은 나뭇가지를 내 침대 맡에 두고 가셨다. 그걸 쓰면서 휴지가 헤지지 않도록 투명 테이프로 돌돌 말기까지 했다. 어쩌면 나보다 할머니가 더, 아니 내 바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할머니는 누구보다 제일 내 얼굴을 낫게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귀가 아파서 더 이상 나뭇가지를 못 걸고 자겠다는 내 말에 내가 더 아프지 않을 방법을 찾다가 휴지로 감싸놓은 이 나뭇가지를 붙들고 혼자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 p.72
내 질문에 남자 친구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는데, 쑥스러워서 그만 웃음이 터졌다. 내 웃음을 보고 확신에 찬 듯 “눈이 예뻐. 웃을 때 눈이 예뻐서 웃는 게 예뻐”라고 대답했다. 콩깍지 꼈다는 말이 무엇인지 몸소 실감하게 해 주었던 그 말 덕분에 나는 잠시 나의 웃음에 묻어나는 아픔을 딛고, 어떠한 걱정 없이 편히 웃을 수 있었다. --- p.90
친구들은 아픈 나와 놀기 위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기다려주었다. 싫은 기색 없이 기다리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친구들 이 당시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별 기대 없이 받는 치료 가 어느덧 일상이 되어 덤덤해질 수 있었던 건 이처럼 아픔을 함께 나누는 법을 알려준 친구들 덕분이었다. 보건소에서 치료받은 시절을 가끔 떠올릴 때면, 친구들이 앉은 의자를 비추던 따뜻한 햇볕과 “끝났어?”라고 반갑게 묻는 친구들의 손을 잡고 “자, 이제 놀러 가자!”라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 p.120
장난이 심하면 눈치라도 있던가, 눈치가 없으면 장난을 치지 말던가. 적정선을 모르는 그의 ‘김슬기 표정 따라 하기’는 계속되었다. 함께 있던 선배는 옆에서 마치 무엇을 따라 하는지 다 아는 사람처럼 따라 웃었다. 결국 그의 입은 방정을 떨었다. “슬기 씨, 슬기 씨는 막 이렇게 웃잖아, 그치? 똑같지? 나 잘 따라 하지?” 그가 방정맞게 뱉은 말을 주워 담는 건 상처받은 나의 몫이었다.
--- p.178
내가 아플 때마다 “오우! 이번엔 이 부위가 아프게 되었습니다!” 하며 책을 시리즈로 쓰지 않는 이상, 세상을 향해 나의 모든 아픔을 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픔을 알아달라는 의도로 글을 쓴 것도 아니다. 타인과 공존하는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미처 느끼지 못한 아픔이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늘 인지하고, 스스로 자기 태도를 되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적어 내려간다.
--- p.215
누군가는 무관심이 최고의 배려라고 말한다. 그 말에 공감한다. 사람마다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을 테고, 대개는 그것을 세상에 꺼내지 않고 혼자만 간직하고 싶을 것이다. 지난날 나도 그러했으니 적어도 나부터라도 타인의 특별한 점과 나와 다른 점을 궁금해하지 않으려 한다.
--- p.226
누군가의 오른쪽에 서는 일은 여전히 무섭다. 어렵다. 불안하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에게 이렇게 부탁한다. “제 왼편에 서지 말아주세요.”
---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