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살펴본 대로 몇몇 제왕시는 즉위식, 결혼식 그리고 전쟁 전후의 기도처럼 특정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행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전에서 거행되었을 것이다. 시편을 종종 ‘제2성전의 찬양집’(the hymn book of the second temple)이라고 불러 왔는데, 여기서 제2성전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재건된 성전을 말한다(스 5-6장). 앞으로 보겠지만, 시편이 우리가 포로기 이후의 것으로 알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시편을 ‘제2성전의 찬양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뒤에서 시편의 연대를 논할 때 살펴보겠지만, 일부 시편은 포로기 이전에 기록되었으며 그런 시편들이 솔로몬이 건축한 첫 성전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특히 왕의 일이나 언약궤와 관련한 시편은 가장 뚜렷하게 이런 경우에 속한다. 주전 587/6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왕국은 사라지고 언약궤는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_1장. 시편 중에서
최근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다양한 ‘지혜의 뿌리’가 서로 배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볼 합당한 이유는 없다. 크렌쇼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배움의 세 가지 주요 맥락, 곧 기본적인 배경에 대해 말해 준다. 즉 가족, 학교, 왕실이다. 이는 합리적인 시나리오로 보인다. 그가 관찰하고 있듯이, 잠언은 배움의 정황인 가족이나 민간에 아주 잘 어울린다. 특별히 잠언 1-9장에서 볼 수 있는(물론 여기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좀 더 복잡한 형태의 교훈 형식은 전문 교사들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잠언 25:1에서 밝히고 있는 잠언 선집 편집에서 왕실 관료들의 활동을 간과해야 할 합당한 이유도 없다. 물론 폭스는 잠언의 몇몇 구절에 대해, 잠언의 민간 기원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왕실 관료들과의 연관성이 강하다고 볼 만한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잠언의 언어가 소농, 왕실 관료, 지식 계급(literati) 등 다양한 사회 그룹에서 기원했지만, 결국 이스라엘 지혜 유산과 문학의 일부가 된 선집을 만든 이들은 학식 있는 성직자와 적어도 몇몇 ‘왕의 신하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학식 있는 성직자와 직업적인 지혜 교사는 분명 고대 근동의 더욱 광범위한 지혜 문학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원래의 이스라엘 지혜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지혜를 가져다 사용했을 것이다.
_3장. 지혜와 지혜 문학 중에서
이러한 관찰을 토대로 성경의 히브리 잠언은 “짧고 기억하기 쉬운 문장으로 구체화된 삶에 대한 숙고(reection)”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잠언을 오용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소통과 가르침의 수단으로서 잠언이 갖는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일 지혜 금언은 맥락을 결여하고 있어서, 청중이나 독자들이 그 정황을 덧붙여야 한다. 잠언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는 배경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잠언이 특정한 관찰이나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적절한 맥락을 직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특정 상황에서 “뛰기 전에 보라”는 격언은 적절한 질책이 된다.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주저하면 놓친다”라는 격언이 값진 통찰을 줄 수도 있다. 아마 잠언 편집자들이 종종 서로 반대되는 잠언을 함께 배치한 이유도 독자들에게 이런 사실을 일깨우기 위함일 것이다.
_4장. 잠언 중에서?
에필로그에서는 인과응보의 법칙과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욥의 친구들의 신학적인 입장이 옳지 않은 것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실 때 피해자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요구하는 욥의 입장은 옳다고 인정을 받는다. 앞서 하나님의 강화에서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욥의 회복은, 그의 완벽한 경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신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구속되고(redeemed) 계신다. 욥기의 메시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분의 왕적인 명령에 복종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악과의 전투가 끝없이 반복적으로 생겨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노예들’(slaves)이다(42:8에서 보통 ‘종’으로 번역하는 단어를 퍼듀는 이렇게 번역한다). 하지만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께 공의롭게 행동하시도록 요구함으로써 악과의 싸움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노예들이다.
_5장. 욥기 중에서?
1:2-3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은 이 책 전체에 걸쳐서 등장하는, 만끽하는 삶을 옹호하는 일곱 구절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낳았다. 크렌쇼는 이 구절을 삶의 무의미 가운데서 무언가를 건지려는 다소 헛된 시도 속에서라도 기쁨을 추구하라는 격려로 본다. 퍼듀의 이해를 따르자면 이 구절은 좀 더 긍정적인 의미로 볼 수 있다. 화이브레이는, 이 구절은 강조의 정도가 안정적으로 점점 강해지는 하나의 시리즈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중 마지막은(11:9-12:7) 끝부분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삶을 만끽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들이라는 권면은, 삶이 짧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을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로 내버리지 않으셨기에 삶에는 긍정적인 특질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확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_6장. 전도서 중에서?
거의 모든 현대 학자들이 아가서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거부하지만, 알레고리적 해석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말해 준다는 점을 인식하는 학자들도 있다. 히브리 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결혼 은유가 쓰인다. 신약성경에서 결혼 은유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쓰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사랑 관계에 대해 아가서가 말하고 있는 바와의 연관성을 숙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알레고리들이 잘못 쓰일 경우, 이 해석 방법은 아가서의 인간적인 측면을 억누르고 종교적인 의미만을 찾는 자의적 방법으로 상세한 부분을 해석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 간의 관계에 결혼 은유를 적용할 때 히브리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놀라운 점은, 오직 두 가지 관계?하나님과 자기 백성 간의 언약 관계, 사람의 결혼 관계?만이 존재하며, 이 관계에서 ‘질투’(jealousy)는 긍정적이고 합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이 두 관계는 모두 경쟁자들의 방해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관계여야 하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