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실린 글들은 감응학을 수립하기 위한 각론적 실천들이라 할 수 있다. 굳이 분과를 따진다면 예술학과 철학, 생명과학과 문학, 문화와 사회비평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특정한 분과학문적 글쓰기를 지양하고 혼종과 교차를 통해 다양한 영역들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를 일종의 감응적 글쓰기라 명명한다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이 가운데는 보다 이론적 논의에 천착하는 글도 있고, 예술이나 과학, 사회적 현상을 통해 감응의 실제적 사례들을 면밀히 고찰하려 한 글도 있다. 어쩌면 감응에 대한 서로 간에 상이한 시각차나 논점의 대립선도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감응이란 느끼고 호응하는 것, 새로운 관계를 구성함으로써 또 다른 관계의 형성을 촉발하는 힘의 운동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 묶인 각각의 글이 차이를 드러내고 또 상호간의 충돌과 변형을 촉진한다면, 이는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 대해 감응되고 감응하는 관계 속에 있음을 뜻할 것이다. 이 점에서 감응의 사유는 언제나 또 다른 감응을 생산하는 긍정적 능력이라는 애초의 정의로 우리는 돌아갈 수 있다.
---「엮은이 서문」중에서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필연적으로 만나고 부딪치며 존재한다.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이 부딪침이나 만남은 각각의 존재자의 신체에 변화를 야기한다. 때로는 신체의 능력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감소시키기도 하며 또 때로는 별다른 증감을 야기하지 않기도 한다. 신체의 능력이 증가할 때 흔히 말하는 쾌감이 발생되고, 감소할 때 불쾌감이 발생된다. 이 쾌감과 불쾌감에는 그에 상응하는 어떤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즉 쾌감에는 기쁨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불쾌감에는 슬픔에 속하는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여 발생하는 이 정서적 반응은 주어진 자극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어떤 작용 내지 행동으로 이어진다. 혹은 좋음/싫음好惡이라는 판단을 동반하는 기억을 통해 이후 유사한 종류의 자극을 다시 얻고자 하거나 미리 피하려 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이처럼 감지感知된 촉발에 응應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感應이다. 따라서 감응이란 어떤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내 신체에 발생한 변화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 효과를 신체 안에 수용하여 얻은 능력의 표현이다. 감응에 의해 신체 안에 수용된 외부, 촉발을 야기한 외부는 그런 방식으로, 그런 정도만큼 촉발 받은 신체 속으로 밀려들어가 신체 안에 침전된다. 그렇게 변화된 신체는 이후 만나는 다른 신체를 촉발한다. 신체 안에 침전된 감응은 그 촉발을 통해 다른 신체 속으로 다시 밀려들어간다.
--- p.15~16
감응을 인간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은 인간만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예외주의에 다름 아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유한한 생명들에게 다른 신체와의 마주침은 존재의 조건이다. 신체와 신체의 마주침이 야기하는 신체의 변화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의 집합이 감응이라면, 인간만이 감응적인 존재일 리가 없다. 쾌/불쾌를 느끼지 못하는 신체란 있을 수 없고, 신체의 쾌/불쾌가 동반하는 정서적 반응이 인간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여길 어떤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에 꿀벌은 꿀물을 마시려고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난초 또한 이기적 유전자의 책동으로 수분 매개체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방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꿀물을 얻지도 못하고, 새끼를 얻는 것도 아닌데 곤충이 거듭거듭 꽃을 찾아온 것은 왜일까? 자신의 식욕을 배반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려는 지상명령도 배반하는 이 기묘한 욕망은 무엇일까? 이는 최소 에너지의 최대 생존전략이라는 면에서는 완전히 잘못된 계산이다.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은 난초도 마찬가지다. 단지 수분만이 목적이었다면 그렇게 자신의 신체적 구조를 바꾸는 데 에너지를 쓸 이유는 전혀 없다. 난초는 왜 쓸데없이 에너지를 쓰는 것일까? 기능과 효율의 면에서는 무용하기 짝이 없는 행위들이지만, 난초와 꿀벌이 그 무용하고 덧없는 행위에 몰두하는 것은 그들이 활발한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난초의 신체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는 수동적인 껍데기가 아니고, 외부의 자극에 촉발되면서 자신의 신체를 변형시킬 줄 아는 똑똑한 신체다.
--- p.98~99
공통 개념을 통해 자신의 감응을 참되게 인식할 때, 우리는 감응을 어느 정도는 ‘치료’할 수 있게 된다. 인식에 기초한 치료법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공통 개념이 동역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시간성, 필연성, 다수성과 관련하여 부적합한 관념들, 다시 말해 수동적 감응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치료법의 전망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반복하자면 우리는 유한하고, 세계는 무한하여, 세계는 우리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감응 치료법은 신체와 정신의 이원론적 관계에서 출발했다. 감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정신에 발휘하는 영향력을 차단한 다음, 신체와 정신의 새로운 연결 관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와 달리 스피노자의 치료법은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들 혹은 그에 수반하는 감응들 간의 동역학적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어떤 감응이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가. 외부 원인에 종속된 감응이 아니라, 나의 본성에 합치하는 감응과 생각들이 헤게모니를 잡아야 한다. 그러한 것들이 참된 관념들과 그것에 수반하는 합리적 감응들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자유로워진다.
--- p.13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