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그 장소를 불쑥 찾았을 때 ‘아, 바로, 그 장면이었지.’ 하고 기억의 저편에 잠자고 있던 느낌이 살아난다면 꽤 유쾌할 듯싶다. 혹 누군가가 이 책 덕분에 이전에 놓쳤던 드라마를 다시 찾아보고 한 번쯤 촬영지를 직접 방문한다면 기분이 아주 상쾌할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쓰며 바랐던 바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드라마 중에서도 특히 깊은 인상을 남겼거나, 매우 감동적이었거나 가슴을 울컥하게 했던, 즉 뭔가 감정을 건드렸던 장면과 연결된 서울의 70곳을 선별해놓았다. 대략 언급된 작품도 200편 이상 될 듯하다.
이미 방영된 드라마들을 다시 보고, 해당 장소와 연관된 장면을 찾아보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단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여러 이야기로 짜인 스토리 카펫 같은 시간이었다.
---「저자 서문」중에서
조선 초기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성곽을 쌓기 시작했는데, 그 기준이 되는 네 산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북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으로 기록해 놓았다. 북악산의 서쪽 능선을 따라가면 인왕산이 나오고, 동쪽 능선을 따라가면 낙산과 이어진다. 낙산에서 남쪽으로 가면 남산이 나오므로, 조선 시대 도성의 규모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강을 넘어 남쪽으로 확장된 서울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두면, 성곽의 주요 지표였던 네 곳의 산중에서도 남산은 강남권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각별한 상징성을 가진다. 에펠탑이나 도쿄타워의 예에서 보듯, 서울을 상징하는 N서울타워가 남산에 있다는 것은 남산이 갖는 공간적?역사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외국인들이 뽑은 서울의 명소 1위에 N서울타워가 꼽히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김삼순과 같은 직업의 남자 주인공 김탁구를 내세워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솔직하고 정직하며 선한 인성의 소유자인 주인공 김탁구가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제빵업계에서 성공해가는 과정을 그린 휴먼 드라마다. 극 중 17회와 18회에 걸쳐서 남산 분수대 주변이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 탁구(윤시윤 분)는 첫사랑인 유경(유진 분)과 6월 25일 오후 6시에 남산 분수대 시계탑 앞에서 만나기로 2년 전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탁구는 막 구운 빵을 들고 약속 장소로 미리 뛰어간다. 분수대 옆에 시계탑이 보이고 그 뒤로 남산 N서울타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유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시간, 유경은 구일중(전광렬 분)의 집에서 서인숙(전인화 분)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 상황.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유경은 별 기대 없이 약속 장소로 향한다. 계단을 오르는 유경의 발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다. 분수대 주변에 서 있는 유경 앞에 탁구가 다가서고 둘은 2년 만에 감격의 포옹을 한다. 탁구는 선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한다. “보고 싶었어, 유경아. 진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이 분수대는 남산도서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면 바로 보인다. 시계탑은 드라마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것이라 현재는 볼 수 없다. 시티헌터의 마디쓰 분식, 김삼순의 삼순이 계단, 김탁구의 분수대등이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남산 산책길에 같이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6.남산」 중에서
서울의 여러 궁이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데 반해 경희궁은 서쪽에 홀로 떨어져 있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었고 본래 이름은 경덕궁이었다. 그러나 궁을 창건한 주체인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고 오히려 인조가 이곳에서 정사를 보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인조 이후, 숙종이 이 궁에서 태어나 승하했고 영조 또한 이곳에서 승하했다. 정조는 이곳에서 즉위하기도 했으니 조선 시대 중기 이후로 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다른 조선 시대의 궁에 비해 늦게 창건이 된 만큼 원래 규모는 상당했으나 1829년의 화재로 궁내 주요 전각의 절반 정도가 소실되었다가 1831년에 중건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 때에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을 많이 옮겨 갔고,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경희궁에 남아 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렸으며 면적도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중락) 경희궁은 서울의 다른 궁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소담스럽고 호젓한 분위기 때문에 친근감을 준다. 드라마 상에서도 경희궁을 배경으로 인상 깊은 장면을 남긴 작품들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을 꼽자면 옥탑방 왕세자와 황진이.
SBS 20부작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는 조선 시대 한양과 21세기 서울을 넘나드는 시공을 초월한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다. 한류 스타인 JYJ의 박유천은 극 중에서 왕세자 이각과 용태용의 1인 2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이각은 숨진 세자빈이 살해된 것으로 생각하고 세 명의 부하와 함께 목격자를 찾기 위해길을 나선다. 그러다가 자객에게 쫓기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갑자기 일식이 생기면서 네 사람은 낭떠러지로 사라지고 서울 박하(한지민 분)의 옥탑방에 도착하게 된다. 이각과 그의 부하들은 300년이란 시간과 한양과 서울이란 공간의 차이 때
문에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렵지만, 시청자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신선하고 코믹한 재미를 맛볼 수 있었다.
드라마 1회의 왕세자 이각(최원홍 분)과 세자빈 화용(김소현 분)의 혼례 장면. 신랑 신부가 전부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혼례 장면에서는 아역 배우들이 등장했다. 숭정문이 비스듬히 열리는가 싶더니 공중에는 다섯 색깔의 천으로 만든 줄이 숭정문에서 숭정전 앞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숭정전 좌우로는 붉은 옷을 입은 신하들이 의관을 갖추고 질서 정연하게 서 있다. 이윽고 혼례의 당사자들인 이각과 화용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등장한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화용의 얼굴과 그녀의 동생인 부용(전민서 분)의 얼굴이 대비된다. 원래 정해진 세자빈은 부용이었으나 욕심 많은 화용은 인두로 동생의 얼굴에 흉을 만들고 동생 대신 혼례를 치르는 자리. 이렇게 엇갈린 이각과 부용의 운명은 먼 길을 돌아 21세기 서울에서 새로운 러브스토리로 이어진다. 경희궁에서 촬영한 혼례 장면은 과거 이곳의 정전이었던 숭정전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식적인 행사들이 진행되었는지 유추해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44. 경희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