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론은 본성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욕망한다. 그리고 확실히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 끝날 때, 그 사회 이론은 죽음을 시작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지금까지 누구로부터도 납득이 가는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성공의 과잉은 성공의 부족보다도 많은 해악을 초래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페미니즘 비평 이론은 이야기의 해석에 새로운 돌파구를 도입했다. 언어와 주체의 복잡한 관계에 관해서도 신선한 빛을 던져주었다. 이것은 대단한 문화적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적이 아닌 해석을 ‘부권제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해석’이라는 딱지를 붙여 내치자 거의 누구로부터도 반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다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그 해석이 ‘부권제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해석’으로서 내쳐지기 전까지는).
우리는 영어 회화 수업을 통해서 영어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상투구를 암기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영어권 사람들에게 고유한 가치관이나 미의식을 신체화시켜 나가게 된다. 영어적인 발상법이나 세계의 수용 방식을 신체에 새기는 것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이상, 영어를 사용해 ‘영어 회화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상(事象)’, ‘영어 회화자가 지금까지 한 번도 언어화한 적이 없는 개념’을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곤란한, 거의 불가능한 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나는 머리가 나쁜 인간입니다’라고 말할 때는 ‘나는 자신의 지적인 능력에 대해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인 인간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동시에 발신하고 있다. ‘나는 사악한 인간입니다’라고 단언할 때는, ‘나는 자신의 도덕성을 과대평가할 정도로 비윤리적인 인간이 아닙니다’라는 메시지를 동시에 발신하고 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말하는 것에 의해 말하고 싶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양식으로 삼는 것은, 음식이나 생리적 안식이 아니다. 인간은 타자에게 사랑받고, 승인되고,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양식으로 해서 살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향한다’라는 테제의 의미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제각각 상대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두 명의 인간이 마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두 사람이 제각각 ‘자기를 타자에게 승인받고, 지고의 가치로서 자기를 타자로부터 인정받는다’고 하는 ‘자기의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경우, ‘양자의 조우는 생사를 건 투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텍스트를 읽는 일에서 무한의 가치와 기쁨을 이끌어내는 것을 금지하고, 텍스트가 얼마나 무가치하고, 그것을 즐기는 것이 얼만 부도덕한 일인가를 논증하는 것에 열중하는 독해 방식, 나는 거기에서 중세의 ‘이단 심문관’적인 심성을 느낀다.
레비나스의 ‘간청’이란 텍스트로부터 의미를 읽어내는 ‘독자의 주체적 개입’을 말한다. 엄밀히 말하면, 텍스트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의식하는 존재가 ‘주체’라고 불릴 수 있다. 읽기에 앞서서 ‘주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의 주체성 혹은 ‘아이덴티티’는 텍스트를 읽어 나가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주체는, 세계 안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경계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필시 이러한 상황을 말하고 있다. 주체란 처음부터 자존(自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임계(臨界) 체험이 가져다주는 ‘경계’ 감각의 효과이다.
같은 텍스트에서 남성 독자는 남성적인 의미를 읽어내고,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적인 의미를 읽어낸다. 교육받은 여성은 교육받은 여성 나름의 의미를, 교육을 받지 않은 여성은 교육을 받지 않은 여성 나름의 의미를, 각각 읽어 나간다. 읽기는 독자의 숫자만큼 있는데(그렇게 나는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권제 사회에 있어서, 모든 독자는 남성중심주의적인 의미만을 읽어내도록 제도적으로 강요되고 있고, 독자 개인에게 ‘읽기의 자유’는 주어지지 않으므로, ‘읽기의 자유’는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페미니즘 언어론의 기간(基幹)을 이루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페미니스트적인 독자’란 ‘나는 여성이다’라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서 시작점에 놓는 독자가 아니다. 혹은 방법론적 기초 짓기를 제시하지 않은 채, ‘문학의 권외(圈外)’로부터 ‘저항하는 독자’를 시험해보는 존재도 아니다. ‘여성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를 미지수로서 읽기 시작하려는 독자,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스트적 독자’이다.
‘언어에 생명을 부여하고’, 언어에 생명을 부여한 후 ‘죽고’, ‘사라진’ 것, 그것을 펠먼과 프로이트는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무언가가 언어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 대상(代償)으로써 언어 속에서 죽는다. 우리는 그 ‘무언가’를, 살아 있는 형태로는 결코 만져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회상하게 만드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필시 그것이야말로 언어의, 혹은 ‘이야기’의 본래의 기능인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숙명에 관하여 말할 때, 그 통찰이 심원하면 심원할수록 그 통찰은 남성도 포함한 인간 그 자체의 숙명에도 타당하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남성도 여성도 양쪽 다 성 질서라고 하는 감옥의 수인(囚人)이라고 하는 원(原)사실에 비한다면, 감옥의 형태나 기능의 차이는 거의 논의할 만한 주제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것이다. 우리는 성에 관하여 말하든, 말하지 않든, 성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도록 구조화된 존재이다. 그것이 ‘성화되어 있다’는 것의 의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그런 것에도, 이제는 적당히 질려버렸어’ 하고 중얼거리는 정도의 일이다. 물론, 그것으로 사태는 조금도 호전될 리는 없다. 성 질서는 점점 더 번창하고 성 질서를 ‘교란시키고, 혼란시키고, 증식시키거나’ 하는 모험적인 행위도 점점 더 번창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뜨거운 어느 날 ‘뜨겁네’ 하고 말해도 조금도 기온이 내려가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카플란이 생각하고 있는 정도로 단순한 것이 아니다. 카플란이 미국 영화에 관하여 말하는 것처럼, 혹은 주디스 페털리가 미국 문학에 관하여 말하는 것처럼, 그것들 전부가 단순히 ‘부권제 이데올로기의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녀들이 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는, 영화나 문학‘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의 영화나 문학의 생산과 소비를 즉각적으로 ‘금지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올바른 영화인이라 해도, 필요 이상으로 훌륭하게 행동하게 되면, 그만큼 억압되는 것은 많아진다. 그리고 표현을 거부당한 욕망이나 불안은 ‘증후’로서 영상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러한 ‘증후’는 표층적으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설정으로 전개되는 영화의 가장자리 혹은 세부에, 스토리와도 테마와도 관계가 없는 영상 기호로서 무심결에 노출된다. 그것은 주요 인물의 배경에 희미하게 비치는 실루엣일 수도, 등장인물의 인명이나 지명일 수도, 배경의 장식이나 소도구일 수도,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배경음악일 수도 있다. 그러한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거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단지 왠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거나, 왠지 집요하거나, 왠지 과잉이거나 하는 방식으로 표준치에서 벗어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리본의 기사]나 [베르사유의 장미] 등 젠더 아이덴티티의 동요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가르쳐주는 것 또한, 성 동일성 장애자의 사례와 일치한다. 그것은 개인의 레벨에서는, 어떤 젠더를 선택하든, 한쪽의 젠더를 선택한 존재는 반드시 젠더 구조의 강화에 봉사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고래(古來)로 인간은 이항대립에 의해 디지털한 이분법을 무수히 쌓아올리는 것에 의해, 아날로그한 무정형적인 세계를 분절하고, 기호화하고, 카탈로그화하고, 이해하고, 소유하고, 지배해왔다. 그것은 ‘야생의 사고’에서 컴퓨터의 ‘비트’의 개념까지 다르지 않다. ‘아날로그한 연속체를 디지털한 이항(二項)으로 잘라서 구분하는’ 것이 인간 사고의 패턴이다. 그것이 ‘지(知)’이고, 그것에 의해 구축된 것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은 그런 식으로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이상, 디지털한 대립을 무효화하고 아날로그한 연속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하이브리드에 혐오와 공포를 느끼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인 것이다. 우리는 하이브리드를 ‘괴물’로서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배제한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가 카오스에 선을 그음으로써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A이면서 동시에 B인 것’을 인간의 문명은 허용하지 않는다.
‘“여자니까”라는 이유로, 그 사회적 기능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주장에 나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회적 능력의 차이는 성차에 우선한다’고 바꿔 읽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회적 능력’이라고 불리는 익숙해진 단어는, 단적으로 ‘돈을 버는 능력’을 말하고, 그것이 만인에게 있어서 우선적으로 개발되어야 하는 인간적 능력으로 간주되는 것은, 극히 한정된 역사적 조건하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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