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성착취 제도는 전쟁 기간 중 어떤 시기, 어떤 지역인가에 따라 형태가 달랐다. 중국에서 일본군은 현지 여자를 납치해 동굴에 한 명씩 가둔 후 성착취에 이용했고 계급이 낮은 남자가 이 과정을 독자적으로 지휘했다. 변호사 가와구치 가즈코는 1941년부터 산시성에 배치된 일본군 병사들이 직접 동굴에 ‘위안소’를 만들어 중국 여자를 납치했으며, 피해자들은 완전한 어둠 속 “나무판자와 풀로 만들어진 침상” 위에서 병사들에게 연쇄 강간을 당했다고 적고 있다. 이들은 화장실에 갈 때만 동굴을 떠날 수 있었고 이때마저 감시받았다. 한 여자는 40일 동안 이렇게 갇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위안소’는 형태와 운영 방식이 일본 민간 성착취 업소와 똑같았다. ‘위안소’에도 장병이 낸 군표를 장부에 기록하는 등 요금 지급 제도가 존재했다. 또 일부 ‘위안소’가 억류된 여자들에게 성병 검사를 시행한 것도 당시 일본 성착취 업소와 비슷했다. 이렇게 업소와 유사한 ‘위안소’는 군이 직접 세우는 때도 있었지만, 위임을 받거나 공모한 성착취 업주들이 대신 세우기도 했으며 군이 기존의 민간 성착취 업소, 공공건물, 민간 주택을 징발해 ‘위안소’로 바꿔놓기도 했다. 1944년 6월 일본군 병사들은 오키나와 주택들을 징발해 ‘위안소’로 활용했다. 이들은 주택에 침대를 줄지어 배치하고 천장에 천을 걸어 칸막이를 만든 후 그곳에서 여자를 성착취했다. 이미 인신매매된 여자들을 전선이나 외곽 주둔지로 재인신매매해 이동식으로 성착취하는 ‘위안소’ 형태도 있었다.
한국인 ‘위안부’ 생존자 김연실은 본인이 매여 있던 ‘위안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 연락선을 타고 성착취당할 여자가 부족했던 근처 일본군 막사로 옮겨졌다고 회고한다. 또한 일본군이 퇴각하는 와중에 이전 점령지의 ‘위안소’에 있던 여자를 납치해 와 끌고 다니며 성착취하는 일도 있었다. 시로타 스즈코는 트루크 제도에서 일본군이 미군 폭격으로 기지에서 후퇴하게 되자 일본군 병사들이 숲에서 목재를 훔쳐내 ‘위안소’를 지었다고 기억한다.
‘위안소’로 인신매매된 여자들은 일본인, 한국인, 대만인, 중국인, 필리핀인, 인도네시아인, 베트남인, 말레이시아인, 태국인, 버마인, 인도인, 티모르인, 차모로인, 네덜란드인, 유라시아인 등의 국적/인종적 배경을 가졌다. …‘위안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수년간 휴식 없이 성착취당한 여자들도 존재했다. 하야시는 여자들이 1) 소개업자를 통하거나 2) 일본군이 현지 동네 유지에게 부탁하거나 3) 일본군 관련인이 직접 납치하는 셋 중 한 가지 방법으로 인신매매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하야시는 한 가지 방법을 빠트렸다. 바로 민간 성착취 업소의 ‘위안소’ 전환이다. 이 경우 여자는 자연스럽게 민간 성착취 피해자에서 군 성착취 피해자가 됐다.
--- 「개요: 첫 번째 피해자 ‘일본군 성노예제’란 무엇인가」 중에서
21세기 들어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첫 번째로 평시 성착취를 성차별적 인권 침해로 바라보는 인식이 강화됐고, 두 번째로 ‘위안부’ 생존자에게 정의를 되찾아 주기 위해 한국을 포함한 여러 정부와 시민 사회가 일본 정부에 점점 더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에서 확산을 멈추지 않는 민간 성노예제 문제가 얽히면 이 두 변화는 서로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아직도 성착취 문제 해결을 위한 유엔 팔레르모 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았으며, 미국 비정부 기구 셰어드 호프 인터내셔널은 일본이 “선진국 중 성착취 시장 규모가 가장 클 것”이라고 추정한다. 일본의 “성 산업은 국민총생산의 1~3% 규모로 일본 국방비 예산과 맞먹는다.”…한국 포주들은 계속 일본을 사업하기 좋은 환경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의 정책 및 사업 환경은 일본 조직폭력배들이 대한 해협 너머의 한국 여자들을 인신매매해 오도록 하는 유입 요인이 되고 있다.
이 책의 목표는 이런 생각들을 연결하여 현대 민간 성노예제를 군 성노예제와 같은 틀에서 이해하고 해결해 나가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일부 부류의 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분위기가 성공적으로 형성되었듯, 다른 성착취 피해자들도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군 성착취와 민간 성착취를 연결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 변화 운동을 해 나갈 만한 지적, 운동적 환경이 거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현시점까지 ‘위안소’ 생존자들의 역사적 경험은 과거 및 현재의 민간 성착취에 반대하는 근절주의 페미니즘 운동과 격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이들의 경험은 상업적 성착취가 아니었다는 듯한 태도다. 이런 접근법이 1990년대 이후 ‘위안부’ 정의 운동의 성과에 일정 부분 이바지했을지는 몰라도, 거의 유사한 경험을 견뎌낸 성착취 선경험 ‘위안부’ 피해자나 현시대 일본 성착취 산업의 한국인 피해자가 공감이나 배상의 측면에서 그 성과를 함께 누릴 수 없다면 ‘위안부’ 운동의 진정한 성공 여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 「개요: 첫 번째 피해자 ‘우리 시대 ‘위안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