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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한국기독교역사

요약 한국기독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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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7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16쪽 | 153*224*20mm
ISBN13 9788974394738
ISBN10 897439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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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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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탄생
1) 이스라엘에서 기독교의 시작과 박해
이 세상에서 기독교가 시작된 시기는 A.D. 30년경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이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이후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오순절 날 기도모임에서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기독교의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 당시는 유대인들도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로마가 이스라엘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로마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종교와 신을 믿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인근지역에는 많은 신과 주가 있었으므로(고전 8:5 참조)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은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반사회적인 존재로 취급받았기에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로마제국은 점점 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가장 무서운 박해자는 A.D. 54~68년 로마황제 네로였다. 잔인하기로 이름난 네로는 로마에 고의로 불을 지르고 불구경을 하면서 수금을 타고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을 그리스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씌우고 말로 할 수 없는 박해를 가했는데 상상 초월하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태워죽이고,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사자 밥으로 내어주고, 심지어는 굶주린 개와 사자들에게 던져 개의 먹이가 되게 하고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그것을 구경하며 즐기는 것이 그의 취미였으니 얼마나 잔악한 인간이었는가? 당시는 거리마다 순교의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 그 당시는 (마10:37,38참조) 말씀대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리라” 이 믿음이 없이는 신앙을 지킬 수 없었다. 그렇게 많은 박해와 환난의 세월이 지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터키 갑바도기아 바위산에 동굴을 파고 수만 명이 수십 년을 살았다. 굴의 깊이는 약 12층 정도로 보는데 현재 6,7층 정도밖에는 발굴을 못했다고 한다. 그 좁은 동굴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2) 로마의 박해가 막을 내리다
그것만 봐도 그들의 신앙은 어떤 신념이나 이론적인 신앙이 아닌 예수가 자신들의 생명 그 이상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는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즉위하고 기독교를 받아드리면서 박해의 막을 내리고 가톨릭의 이름으로 로마의 국교로 인정하였다. 안식일 예배를 일요일로 바꾸고 교회정치까지 주관하였다. 어떠하든 핍박이 없어지고 자유를 주었으니 다시 복음의 전파가 시작되었다. 그 후 기독교는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 유럽지역에서도 기독교(가톨릭)를 받아드렸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리가 정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초기에는 많은 분파가 생겨났고 또한 교황의 지배 아래서 가톨릭교회는 부패가 심각하였다.

3) 종교개혁이 일어나다
1517년에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의 칼뱅과 스위스의 츠빙글리 등 여러 신부들과 신학자들과 교부들이 종교개혁에 합세하여 부패한 가톨릭을 비판하고 탈퇴하여 기독교의 정당성을 부각시키며 정통 기독교(개신교)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완전 탈바꿈을 하는 개혁의 과정에서 또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다. 영국의 여왕도 영국 국교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이때 박해받던 영국의 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1620년 8월 15일 102명이 승선하여 미지의 땅 ‘아메리카 대륙’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태평양을 건넜다. 천신만고 끝에 1620년 12월 2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연안에 도착하여 정착하고 뿌리를 내리고 농사지으며 먼저 교회부터 건축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 후 미국전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급성장하여 훗날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제 1의 대국이 된 것이다. 또한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의 많은 선교사들이 미지의 세계로 선교를 떠나고 전 세계 복음화에 앞장섰다. 지금은 복음이 안 들어간 곳이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아직도 이슬람권에서는 선교의 장벽이 너무 높다. 이슬람은 앞으로 한국에 상당한 위협이 될 그런 종교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이 분명하므로 꼭 알아 두어야 하겠기에 후반부에서 상세하게 소개하기로 하겠다.


2. 한국에 천주교와 기독교를 전래한 선교사들
1) 천주교 전래
한국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불교와 유교만 존재했었다. 그러므로 조상제사와 불교를 절대적 민족 신앙처럼 믿고 살았으며 또한 무속 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 중에 천주교가 처음 조선에 들어오게 된 동기는 1592년 임진왜란이다. 이때 왜장 소서행장이 천주교 신자로 조선에 들어와 천주학을 설파하려 했으나 별 효과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천주교는 ‘서양학’이라는 명분으로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에 의해 들어오게 되었는데, 봉건사상이 유달리 강한 조선인에게는 별다른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 1636년 병자호란 때(청나라에 바치는 조공이 너무 무겁다고 거부하려다 침략당한 전쟁)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 일행이 지금의 만주 봉천에서 유배 중에 천주교 신부 아담샬을 만나 전도를 받고 처음 조선인으로 천주학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으로 천주학을 더 이상 전승되지 못했다. 그 후 1783년 북경사신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2. 한국에 천주교와 기독교를 전래한 선교사들 13프랑스에서 온 천주교 신부 그라몽을 만나 천주학을 받고 신자가 되어 조선의 첫 영세자가 되었고, 돌아와 서울 명동에 천주교회를 설립하여 한국 천주교의 첫 초석이 되었다. 이숭훈. 그는 1789년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32세에 평택 현감을 지냈으나 그 후 모든 벼슬을 다 버리고 천주교리에 심취하였다. 천주학을 전파하다가 조선 정부에 의해 최초의 순교자가 된다. 그 후 조선의 박해는 계속되고 100여 년간 천주교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핍박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점점 성장되었다.1777년 이익, 정약용, 전철신, 이신, 이덕조 등이 천주교 교리연구회를 개설하고 천주학을 전파하려고 하였는데 1801년 5월 31일 순조 때에100명이 참수당하고 400명이 귀양을 갔다. 신유사옥 사건으로 인해 황사영의 백서사건, 즉 로마교황청에 보내는 청원편지에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선의 박해를 제지해달라는 내용이 애석하게도 사전에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아주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만여 명 이상이 잔인하게 죽어갔다.

2) 토마스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는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마치고 1863년 런던선교회에서 중국 상하이로 파송되었다가 부인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병사한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밀수무역상 김자평 외 3인의 청년들이 중국 산동성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영국 월리엄슨 목사의 거처에 피신하여 숨어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토마스 선교사는 그곳으로 찾아가 김자평 천주교인을 만나 조선에 대한 많은 정보를 듣고 조선 선교를 결심한다. 김자평을 통해 한국어와 조선 지리 등 많은 안내를 받으며 선교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것이 발각되어 훗날 1868년 4월 김자평은 황해도 감사에 의해 체포되고 사형을 당한다.1865년 9월 순교를 각오한토마스는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 서해안 백령도에 도착해서 선진포, 석호정, 만경대 등을 돌며 1백여 권의 성경책을 나눠주며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곧바로 선교활동에 착수하여 섬 주민들에게 포교하러 나서는데 목선을 타고 가던 중 파도에 배가 파선되어 죽을 위기도 겪었다. 그는 극적으로 살아나 1866년 1월 다시 중국북경으로 들어가 숨을 돌린 뒤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성경을 가지고 대동강 나루에 도착했다. 하지만 통상을 거부하는 조선과 미국 상인들이 싸움이 붙어 배는 불타고 선원은 전멸 당했다.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9월 2일 27세의 나이로 포졸에 의해참수 당했다. 성경 한 권도 전하지 못한 채 가지고 온 성경을 끌어안고 포졸에게 참수당하면서도 “이 책을 읽고 구원 받으시오!” 하며 숨을 거둠으로 첫 순교자가 되었는데 그때 서너 명의 소년들이 이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였다. 이때부터 조선에서 순교의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15이 사건 때문에 천주교에 대한 핍박은 더욱 심해진다. 2차, 3차 상선들이 들어와 협상을 요구하면 거절하고 공격을 하고 싸움에 애꿎은 천주교인들만 피를 흘리게 되었다. 철통같은 조선에서 포교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1886년 한불(한국과 프랑스) 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협정하였으나 쇄국정책의 나라에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1832년 독일에 카알 구츨라프 목사도 중국 상선을 타고 충남 서해안고대도에 들어와 농민들에게 감자 재배법 등을 알려주기도 하고, 의료 활동을 펴며 포교를 시도하였고 정부에 수차례 통상 협상을 청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하고 1932년 8월에 서해 고대도를 떠나고 말았다. 이 무렵 로스와 메킨타이어 선교사는 만주의 한 여관에서 선교 대상을 여관 주인에게 조선인과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여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4명을 어렵게 만나게 되어 전도를 하였는데 3명은 거부하고 돌아가고 이응찬은 신학문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돌아갔던 3명이 다시 돌아와 합류하여 이들로 인해 최초 한국어 성경 ‘쪽복음’이 만들어졌다. 1875년부터 일본 마수의 손길이 한국을 덮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 국내에 보수파와 진보파가 갈라지며 혼란의 시기가 연출된다. 성경인쇄를 위해 거물급 상인 서상륜을 포교하려 했으나 거절하고 돌아가던 중 별안간 쓰러져 중병을 앓게 된다. 이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정성껏 치료를 해주었다. 그 덕분에 회복이 된 서상륜은 큰 감동을 받고 예수를 영접하고 성경번역 인쇄를 하게 되며 최초로 한국에 송내교회를 설립한 최초의 장로가 된다.1882년 활자 인쇄가 개발되어 성경을 찍어내기 시작했고 1887년에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 서상륜은 약장수로 변장하고 약을 팔면서 성경을 보급했다. 서해안을 선교 무대로 삼고 열심히 성경을 전달하였다. 1884년에 만주를 떠나 한국으로 가던 중 고려문이라는 검문에서 보따리 속숨겨 두었던 성경이 발각되어 문초를 당하고 옥에 갇힌다. 그날 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옛날에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그곳에서 관노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감옥을 빠져나와 말까지 얻어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10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그 날 서상륜은 동생 경조에게 전도를 했다. 동생도 옛날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당하는 현장을 목격하였는데 왜 이렇게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성경을 전하려 했을까 뭔지 모르지만 무척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형의 전도를 받고 마음이 열려 쾌히 승낙하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 후 서경조는 한국의 최초 7인의 목사 중 한 명이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신묘막측하다.

한국의 부흥사들 이야기
1) 김익두 목사
초기의 한국 교회 부흥사들의 업적은 참으로 대단했다. 지금은 그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진실하고 능력이 넘치는 훌륭한 주의 종들이 오늘의 한국교회의 발판을 만들었다. 김익두는 황해도 안악 출생(1874~1950)으로 16세에 과거에 낙방하여 부친이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또 친구에게 빚보증을 서 주었다가 낭패를 당하고 매일 술로 방탕한 세월을 보내며 깡패가 되어 동네에서 개망나니로 낙인이 찍혔다. 길에서 선교사들이 노방전도하며 전도지를 주면 그자리에서 전도지로 코를 팽~ 하고 풀어 버렸다. 이때 외국 선교사가 “여보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 코가 썩습니다!” 라고 했다. “뭐라고? 이걸 그냥 팰 수도 없고...!”하며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코가 썩는다는 소리가 계속 마음에 걸려 꺼림칙하던 차에 친구가 자꾸 교회에 같이 가보자고 권유하여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말씀이 꼭 나 들으라는 소리 같고 마음에 감동이 오며 새사람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김익두가 교회를 다니며 변했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다 퍼졌다. 어느 날 성경책을 끼고 교회를 가는데 논에서 모를 심고 있던 동네 건달이 시비를 걸어왔다. “저 놈이 교회를 다닌다고? 야! 이 미친놈아! 니가 교회를 다닌다며?” 하고 약을 올리는 것이다. 화가 치밀어오른 김익두는 “주님, 잠깐만 여기 계세요.” 하고 성경책을 논두렁에 놓고 쫓아가서 그놈을 번쩍 들어 논바닥에 거꾸로 처박았다. 그때 옆에 있던 노인이 “흥! 저놈 죽었다더니 아직 시퍼렇게 살았네” 하는 소리에 가슴이 콕 찔렸다. “아, 내가 아직도 저 노인 말대로 시퍼렇게 옛사람이 살아있었구나!” 하고 진짜로 회개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 뒤로 어떤 모욕을 당해도 구정물을 끼얹어도 따귀를 때려도 아멘감사하며 예수로 살기 시작했다.
그는 1910년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었다. 신천교회 위임목사가 되어 목회하면서, 제자 200명을 목사로 키웠고, 교회를 150여개를 짓기도 하였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부터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김익두는 대 부흥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례를 받기 위해 성경을 100번을 읽은 후에 세례를 받았을 만큼 그의 믿음 생활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사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읽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설교내용은 예수의 십자가와 속죄, 회개와 중생의 체험 그리고 부활과 천국을 외치고 다녔다. 그는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병고침등 여러 기적이 나타나므로 그가 가는 곳마다 인해를 이루었다.
1920년6월 평양의 연합부흥 집회에는 3천 명이 모일 수 있는 장대현 교회에 1만 명이 모여들어 들어갈 틈이 없이 콩나물 시루처럼 모여들었고 그 해 10월 서울의 승동교회에서 열린 일곱 교회 연합집회에도 1만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50여 년 동안 그는 국내와 일본 및 시베리아 지방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776회의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150여 곳에 교회당을 세우고 1만 명을 넘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그리고 훗날 그의 손자며느리가 탈북하여 증언한 바에 의하면 할아버지 김익두 목사는 신천교회에서 새벽기도 설교를 하던 중에 공산군이 쳐들어와 총을 들이대자 장로가 나와 예배나 끝나면 죽이라고 하자 장로 먼저 총으로 쏘고 김목사에게 총질을 하여 그 자리서 피를 흘리며 순교하는 시할아버지를 생생히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가시며 마지막 한마디 “공산군을 용서해라.”라는 마지막한 마디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증언하였다.
최초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성인들로 인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진실로 하나님을 확실히 만난 사도들이었다. 오직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예수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어산 사람들이다. 그 당시 한국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은 진실로 거룩하고성스러운 주의 종들의 피로 세워진 교회들이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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