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 찾아오신다. 따라서 우리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인지 알고 느끼도록 인도하신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지만, 하나님
이 우리 죄를 얼마나 미워하고 혐오하며 진노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지를 말이다. 한 번이라도 이러한 것들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 충격으로 감동받거나 마음이 흔들리고 변화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런 성령의 역사를 느끼도록 이끌어 줄 여행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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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잘한 일이라도 동기를 점검해 보면 적어도 죄악의 요소가 있고, 매일의 삶이 온통 더럽혀져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매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의 약점과 변덕스런
마음을 스스로 절감하게 되고, 끝까지 내적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성령께 계속해서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신은 결코 원하는 만큼 성결을 이룰 수 없다.”사도 바울은 성인이라 불렸던 사람들의 내부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았던 게 분명하다. 이제 바울이 틀렸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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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이처럼 지나친 나머지 해롭기 그지없는 주관적인 생각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성령의 새 언약 사역과 보조를 맞추는 법을 배우고, 구원자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모범이요 앞으로 오실 심판자이시고, 약하고 가난하며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들의 연인이시며, 친히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우면 된다. 그러면 본질적인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 때에 전형적인 체험을 겪는다는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과거의 회심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현재의 회심한 상태뿐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의 체험만을 따로 떼어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표시라고 여기는 습관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육신한 하나님께서 찬양과 섬김을 통해 온전히 경배받으셔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주 예수를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도록 대기시킨다는 불경한 생각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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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목적임을 기억하라. 그는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 5:25, 26. NIV의“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심”이라는 번역이 더 낫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이유도 거룩해지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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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냄)을 일반적으로 성령세례와 함께 따라오는 표적이라고 주장한다. 방언은 하나님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찬양하게 하기 위해 주신 역량이다. 이러한 방언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배자들은 방언을 통해 고양된 상태로 경배, 참회, 간구, 도고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방언의 은사는 대개 개인 경건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관적으로, 방언할 때는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며, 성대가 자유롭게 울리도록 허용해야 한다. 수영을 배울 때처럼 매체(수영의 경우는 물, 방언의 경우는 재잘거리는 발성)를 신뢰하고, 거기에 자신을 어느 정도 내맡기느냐에 따라 얼마나 성공하고 향유할 수 있을지가 판가름 난다.
방언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NEB에서 고전 14장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끔 오역했다) 황홀경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방언으로 말할 때는, 다른 일반적인 언어로 말할 때처럼 감정과 의지를 제대로 통제하면서 정상적인 심리상태하에 객관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일단 처음 느꼈던 새로움이 사라지고 나면,‘때로는 방언으로 말하면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일반적으로 일단 한번 방언을 시작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방언을 하게 되며, 자신들에게 실제적이고 적합한 기도의 형태로 방언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1절부터 19절에서 말한 대로, 방언 사용자들은 방언을 경량급 은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방언이 자신들의 경건 생활에 유익을 주기 때문에 방언을 소중히 여긴다. 방언을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시작했건, 아니면 필요한 발성기법을 배워서였건(두 경우 다 일어난다), 일단 방언을 하게
되면 경건 생활에 미치는 가치는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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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으로 성령세례는 17세기 청교도인 토머스 굿윈이 에베소서 1장 13절에 대한 설교에서 명쾌하게 설명한‘성령의 인침’(the sealing of the Spirit)의 체험이다. 17 18, 19세기에 웨슬리의 추종자들이 증언했던‘완전한 사랑’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이것과 유사하다. 또한 섬기는 데에 필요한 능력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어지는‘성령 안에서의 세례’도 성령의 인침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찰스 피니(Charles Finney), 무디, 심슨(A. B. Simpson), 토리 같은 19세기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통해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 각자가 성령의 사역 안에서 인격이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마이어가 묘사했던‘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이른바‘케직 체험’또한 그 견해와 일치하며,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친밀함에 대한 많은 기록도 동일한 견해를 보인다.
--- p.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