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이 책은 여러분이 알고 싶어 하지 않지만 알아야만 하는 불편한 진실, 의료계의 민낯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독자들께 알려드리고 싶은 최고의 반전은, 놀랍게도 이 이야기가 환자의 안전을 위해 의료인의 법적 노동시간인 주 평균 52시간을 지키려는 영국 의료진들의 이야기인 반면에 아직도 우리나라는 많은 곳에서 이를 훨씬 넘어서는 주 88시간 노동의 전공의법조차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국 의사들이 법적으로 52시간, 실제로는 70시간 이상 근무한다면, 한국의 의사들은 법적 근로시간은 주 88시간임에도 실제로는 100시간 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주 88시간의 대한민국 전공의법에는 당직 시간은 36시간을 넘길 수 없고(놀랍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36시간을 깨어있으면서 진료를 본다니!)
이 당직을 주 3회 이상 할 수 없으며(심지어 36시간씩 주 3회를 깨어있다니!!) 최소한 주 24시간의 오프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현장에서는 극심한 인력난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 88시간을 훨씬 넘게 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동이 위태롭게 방치될 수도 있는 것이죠. 저의 현장 경험으로 보건대, 많은 이들이 이런 끔찍한 노동이 불러오는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이 책은 인력이 부족한 의료현장의 민낯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감수자의 말 중에서)
②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나는 의사가 되겠다고 TV 기자로서의 커리어를 집어 던졌다. 내가 갖고 싶은 직업과 기자라는 직업을 바꾸면서, 나는 이제 전쟁터는 뒤로 멀리 떼어놓고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습게도-병원이라는 곳이 치유를 위한 최후의 보루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한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려웠던 경험은 콩고의 킬링필드에서 빗발치는 총소리에 숨죽이고 있었던 그 시간들이 아니라 영국의 한 수련 병원에서 첫 야간 당직을 서던 날이었다. 만약 그 때 누가 나에게 첫 야간 당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경험인지 말해줬더라도, 나는 아마 헛소리 하지 말라고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의대에서 막 떨어져 나와 피와 고통과 좌절과 죽음이 가득한 세상으로 던져진다는 것의 공포는 다른 어떤 공포와도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그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만, 사실 그러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첫 야간 당직은 마치 징역살이를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막 ‘의사제조공장’에서 성형되어 나온 새내기 의사로서, 췌장염의 원인 스물여덟 가지,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뼈 206개의 이름, 스트레스와 공포의 신경생리학 같은 것들을 줄줄이 꿰고는 있었지만, 응급환자를 앞에 두고서는 어떤 결정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깜깜한 처지였다. 만약 내가 환자에 대해 잘못 판단한다면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이 모든 지식들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굳이 걱정할 필요 없는 환자와 진짜 신경을 써야 할 환자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병원 전체의 각 병동마다 나의 미숙한 손에 의지한 채 수백 명의 생명들이 희미한 조명 아래서 잠들려 하고 있었다. 나는 의사 가운을 입은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다.
③ 의대에 갓 입학했을 때, 확실성을 시사하는 단어는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배웠다. 의사가 ‘절대로’, ‘항상’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외 없는 법은 없듯이, 예외 없는 질병은 없다. 환자와 환자의 질병이 내가 열심히 외웠던 교과서의 내용대로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다. 그러나 안개가 낀 듯 뿌옇고, 불확실하고, 완벽하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는 병원이라는 세상도 어떤 고정된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우리 보건 서비스의 핵심축은 그 시스템 내부의 스태프들을 견인하는 본능이다. 대개의 경우, 내 동료들은 몹쓸 병에 걸린 불운한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거나 죽음을 늦추고 시간이라도 벌겠다는 열정으로 NHS를 떠받치고 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환자가 질병과 싸우는 길을 함께 걸음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한다. 우리의 일차적인 동기는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환자들로부터 매일 매일 새로움을 깨닫고 영감을 받는다.
우리는 의사가 되기 전에는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던 인간으로서의 선의-사랑, 연민, 강인함, 위엄-를 환자와 그들의 가족에게서 끊임없이 목격하는 축복을 받았다. 우리는 인간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을, 가장 잔인한 일격과 믿어지지 않는 회복의 스토리를 목격한다. 우리는 거기서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돕고 있다.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진해버렸을지라도, 우리는 따뜻한 손길, 다정한 말 한마디, 위로가 되는 미소 한 조각으로 환자들을 어루만진다. 때로는 그 길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두려움을 주기도 하며, 때로는 숨조차 멈추게 만든다. 의학은 아프고, 쓰리고, 견디기 어렵고, 장엄하다. 나로서는 그 어떤 직업도 의사와 비교할 수 없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