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의 핵심(마태복음 16장 16절)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소개한 성경이 복음서이다. 구약의 히브리어 ‘메시아’에서 신약의 헬라어 ‘그리스도’로 어휘도 달라진다. 예수님 당시 사회적 배경을 유대 종교와 유대민족주의가 그 어느 식민 지역 보다 뚜렷이 유지 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의 법치 아래 있었다. 또한 로마제국 자체가 이전의 헬라의 모든 문화와 철학 사상을 수용하였다. 당시의 언어도 헬라어가 국제 언어로 통했다. 이 배경에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복음서 기자들도 각각 일차적 수신 대상들을 구분했다.
마태의 일차적 수신자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님이 오셨는데 다윗 왕의 혈통으로 오신 것을 증언한다.
그래서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마1:1)고 하여 처음부터 왕의 족보를 소개했다. 그의 복음서는 유대적 색채가 짙다.
마가의 일차적 수신 대상은 로마인이다. 마가는 로마인에게 맞는 간략한 전기체(傳記體)로 로마인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은 처음부터 동족의 모함을 받아 공격당하고 도살장의 어린양과 같이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서 형틀에 못질 당하는 고난의 종으로 보게 되었다.
누가의 일차 대상은 헬라인이다. 누가는 의사로 헬라인이며 사도행전을 이어서 기록했다. 누가복음의 특징은 서정적 문학 작품들로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회화(繪畵)적 정서를 보인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눅 10:25-37), 100마리 양 중에 잃은 양 한 마리(눅 15:1-17), 돌아온 탕자(눅 15:11-32), 부자와 나사로(눅 16:19-31), 삭개오 이야기(눅 19:1-10)와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눅 24:13-35)들은 세상의 어느 것도 견줄 수 없는 문학작품이다. 누가는 예수님이 헬라의 철학적 스승들을 능가하는 참 스승이요 참 선지자로 소개한다.
요한은 유대, 로마, 헬라 전체를 일차 대상으로 하여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한다(요 1:14). 그래서 요한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생명이시고, 빛이시라고 소개하는데 요한은 그의 책으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이적들을 소개하면서 그 기적(奇蹟,Miracle)이 의미하는 표적(表迹,Sign)을 거의 각 장마다에서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요 6:1-71) 기적자체의 기술은 1절부터 15절 까지 할애하지만 그 기적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에는 22절부터 71절까지를 하고 있다. 이것이 전자는 기적(Miracle) 자체이고, 후자는 표적(Sign) 즉, 기적으로 나타내고자하는 의미이다. 그것은 이 기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예언된 참 생명의 떡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르치는 목적에 기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요 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 목적은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분명히 숙지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삶이 도움이 필요한 세상에 도움을 베푸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의 일이었다. 만약 배고픈 자를 먹이는 일로 오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조금 후에 다시 배고팠을 때 또 먹이셔야 했을 것인데 더 이상 먹이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기적으로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따르는 자들의 선택이요 따르는 자들의 믿음이다.
이 일은 요한이 11장에서 또 들어낸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여동생들이 예수님께 기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 남매들을 사랑하사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으셨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하셨다(요 11:4-15). 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무덤에 이미 장사된 나사로를 불러내신 것이다(요 11:43). 만약 예수님이 병든 자들을 고쳐주러 오셨다면 나사로 뿐 아니라 당시에, 최소한 그 주변에 있는 자들을 다 고쳐주고 살려주어야 맞다. 그러나 그 기적으로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증거 되었다. 이 일로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세상에 알리신 것으로 목적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6장 16절은 4복음서의 요절이 된다. 제자들을 부르신지 거의 3년이 지나왔을 때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질문하신다. “나를 계속 따라다니는 저 무리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오직’으로 붙잡을 것을 가르치시려고 사람들의 생각을 제자들에게 먼저 주지시키시는 것이다.
이제 마태복음 16:16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으로 복음서가 정리 되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되시는 증언은 4복음서의 핵심이요 요약이다.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윤각이 들어난 것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써 마태를 통해서는 ‘만왕의 왕’이며, 마가를 통해서는 자신의 피로 영원한 제물을 드린 ‘십자가의 참 제사장’이며, 누가는 예수님이 ‘영원한 스승 참 선지자’이심을 증거 한다. 요한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참 하나님’ 이심을 밝히고 있다.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쫓던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으로는 세상을 살릴 수 있는 답이 되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열렬히 예수님을 쫓아 다녔으나 그들이 가진 답은 세례 요한(사회 운동)이나, 엘리야(신비주의), 예레미야(박애주의), 선지자들 중 하나(종교)였다. 예수님은 ‘자 봐라, 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저들을 세상에 보내서 복음을 증거하게 할 수 있겠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대표로 고백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이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답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제자들에게 능력이 필요하면 주께서 필요한 능력을 주시면 된다. 문제는 ‘답’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살릴 수 있는 답을 주셨는데, 그 답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답이 ‘오직’으로 되었느냐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당장, 그리고 끝까지 필요한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고, 세상을 살릴 유일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답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답을 가진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증거 할 때 그들이 당장, 또 영원히 필요한 능력을 주님이 주셨다.
이제 복음서의 핵심을 정리하면 이렇다. “주 나사렛 사람(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즉, 참 왕이시오(마태), 참 제사장이시오(마가), 참 선지자이시오(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요한)” 이 유일하고 완전하며 영원한 답을 가지고 제자들과 초대교회는 당시의 거대한 장벽, 유대 민족 종교 사상과 로마의 힘과 모든 조직, 황제 숭배와 미신적 종교, 그리고 헬라의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에 이르는 철학과 지식을 뛰어 넘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불신자에게나 신자에게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했다(고후 2:15) 또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도 하며 그 편지는 마음 판에 쓴 것이고(고후 3:3) 돌에 쓴 율법 조문이 아니고 영으로 써진 것이라 하며, 모세의 율법 조문은 죽게 하는 것이라 했다(고후 3:6-7). 모세의 얼굴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어 수건으로 모세의 얼굴을 가렸지만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고,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했다(고후 3:14-17). 그러면서 만일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고,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요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그 분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했다(고후 4:3, 5).
전도제자의 체질은 질그릇 속의 보배처럼, 그리스도로 채워진 복음의 체질을 말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고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후 5:17)고 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