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교회 성장의 많은 부분이 이 사회에 대한 관심과 행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초교파적인 운동을 또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 논리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다 함께 모여 찬양과 경배, 전도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질수록 더 좋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서로에 대한 진지한 사랑이 없이는 우리 자신과 교회, 선교 단체 사역에 서로 방해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 p.54
하나님께서는 그 긍휼과 은혜, 신비로 엉망인 상황에서도 종종 위대한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 바로 메시올로지다. 그 일은 우리에게 그리고 어쩌면 그분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일은 살아 계신 하나님 안에서 우선순위를 보여 주신 것이며, 그분은 각 기 다른 사람들과 교회들과 상황들에 맞는 방식으로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드러내신다.
--- pp.61-62
사소하거나 논쟁이 될 만한 이슈들에 대해 좀 더 유연해지고 지나친 독단주의가 좀 더 줄어든다면, 그런 이슈에 반응하여 불신앙의 깊은 늪에 빠지는 사람들도 더 줄어들 것이다. 지나치게 독단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결국 신앙을 아예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는데, 나도 그들 중에 들어갈 뻔 했다. 내가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태도의 변화, 곧 더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또 우리의 생각 속에 원하시는 것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라. 더 풍성한 성령의 열매로 사는 것과 더 배려 깊은 교리적 발언도 물론 포함된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과연 우리가 진심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 다른 방식으로 믿는 사람들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좀 더 존중할 수 없을까? 특별히 그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본적으로 여전히 믿는다면 말이다.
--- pp.80-81
비난을 잘 대처하는 것은 리더십의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이 나에게는 때때로 감내하기 어려웠고 개인적인 상처로 다가왔다. 우리의 결혼이나 아내에 대한 비난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직접 듣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듣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당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비난을 받을 때, 당신은 리더십의 대부분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부분까지 속속들이 검증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가 정말 최악의 뒷담화나 비난을 듣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히 여러분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력 질주를 한다면 말이다. 나는 데일 로턴과 피터 메이든과 같이 내가 아는 신실한 사람들이 나를 종종 찾아와 격려하고 지지해 주는 엄청난 축복을 누렸다. 그러한 신실한 친구들이나 동역자들이 없는 리더들은 훨씬 더 힘겨울 것이다.
--- p.97
우리가 쉽게 저지르는 다양한 실수를 종합해 보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게 되는 하나의 공식이 나온다. 자신의 사역이나 직업 그리고 결혼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한 사람이 많다. 나는 늘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전폭적인 은혜를 나누려고 노력한다. “당신이 실패를 많이 했고 플랜 A를 놓쳤다면, 플랜 B는 그보다 좋을 수 있으니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실수를 하고 워낙 실패를 많이 했기 때문에 아마 플랜 H 내지 플랜 M쯤 된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런 알파벳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천국(Heaven)의 계획, 주님(Master)의 계획이 있다고 믿으며 주님을 찬양합시다.”라고 말해 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웃을지 모르지만, 이건 그냥 웃고 끝날 일이 아니다. 그런 실수들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많은 어려움에서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어떤 종류의 운명론(fatalism)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영적인 부분과 현실적인 부분에서 성경의 가르침 전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잠언서가 있겠는가?
--- pp.105-106
교회 안에서 우리가 완전 새로운 종류의 바리새인들을 양산해 내고 분열과 혼란을 가져와 결국 낙담과 신앙의 상실을 초래하지 는 않을까 두렵다. 심지어 가정 안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우 리가 강한 확신을 가지면서도 겸손하게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없을까? 어떤 이슈에 대해 좀 더 다양한 관점으로 듣고 볼 수는 없을까? (즉각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요즘 세상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의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나누는 학자들, 특별히 경건한 남녀들에게서 우 리가 배우면 안 될까? 종종 편견과 혐오 언어가 섞인 표현으로 무슬림에 대해 (그리고 다른 많은 인종에 대해) 일반화시키는 것을 우 리 모두는 경계해야 한다. 어떤 책들은 여기에 논쟁의 불길을 더 키우며, 요즘에는 너도나도 이슬람에 대해 많이 안다고 주장한 다. 나의 생각이 틀릴 수 있지만, 내 눈에는 그들의 자긍심, 조급 함, 교만이 많이 보이고, 예수님 앞에 겸손과 깨어짐(brokenness)은 아주 적어 보인다.
--- pp.126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 중에 하나는, 어떤 사람이나 사건과 관련된 상처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수백 번쯤은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실망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에게 악한 감정을 품은 채 잠이 든 적은 없다. 그것은 내게 선택 사항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용서해야 하고 아예 잊어버리고자 애써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에 비춰볼 때, 누군가에게 앙심을 품는 것은 더욱 나쁘고 어리석은 일이다. 상대방에게 똑같이 복수하려고 어떤 형태로든 앙 갚음하는 것은 살아 계신 사랑의 주님의 제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과 전혀 문제없이 훌륭한 교제를 서로 나 누거나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더욱이 항상 가능한 일 도 아니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면서, 나로서는 어려웠지만, 우 리는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계속 전진하는 법을 배웠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 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사랑, 존중, 용서와는 다른 차원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의 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다.
--- pp.133-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