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하나님의 자리에 오른 목사를 인간 본래 자리에 앉히고 싶은 마음뿐이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설교하는 죄인이다. 이 정체성을 겸허히 인정하는 순간, 개신교의 부패와 비리는 최소화될 수 있다고 본다.--- p.9 「한국 종교를 더이상 창피해하고 싶지만은 않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에, 당시 교회는 민족 복음화에 전력을 기울일 때였지. 성과의 요체는 팽창이었어. 개인보다는 조직(국가)이었기에 획일성, 독재성은 용인됐고. 거기에 정서도 통했지. 반공주의라는. 그래도 이 나라의 개신교는 선교사를 통해 유입되고 정착된 거 아니겠어. 당연히 청교도주의(Puritanism)가 강했다고. 배타주의 등 논란을 야기한 부분도 많았지만, 청빈, 검소, 이웃 배려 같은 가치는 좋았다고. 하지만 박정희 시대 ‘압축성장’의 기치가 모든 것에 우위를 점하던 시기에는 무시되고 말았어. 이러다보니 탈정치화를 넘어 거짓 정치와의 결탁을 초래하게 되지. 보라고. 5?16 군사 쿠데타도, 베트남전 참전도, 3선 개헌도, 유신 독재도, 긴급조치도 문제없다며 군사정권에 힘을 실어준 당시 교회 지도자들, 어땠냐고. 자기들은 이야기해. ‘정교분리’를 했다
고. 이게 정교분리일까. 탈정치화라고 봐야 하겠지.--- p.204 「현대사와 개신교회사 간의 역학관계 리포트」
육봉기 늘 막말, 저주, 폭언뿐이구만. 그러면 기독교인이라는 걸 감추든지 신앙을 포기하든지 해야지, 예수 믿는다고 동네방네 떠들며 기독교 망신을 시켜? 그리고 여성을 강간해야 한다고도 했다던데, 당신은 이미 언어폭력을 넘어서 우범자라고!
김용민 막말의 원조하면 세례 요한이지. 내가 만약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다면 성경에 나오는 것이니 듣기 편한 욕이었다고 평했을까. 우선 나의 그 욕설이 왜 나왔는지에 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실한 게 아니다. 이런 거에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는 스타일이다만 할당된 지면이 있어 언급한다. 당시 언사는 유린당한 미군 범죄 피해자들의 아픔을 미국 최고 지도자들은 외면하지 말라는 취지다. 월드스타 싸이를 좀 엮어 보련다. 그도 노래에서 ‘이라크인을 고문하고 죽이는 미군과 그 가족을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이자’라고 했다. 내가 막말하던 2004년 바로 그해에 말이다. 이 말이 또 내 말이 옳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뜻으로 곡해하지 마.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액면만 떼어 평할 건 아니라는 말이야. 그 맥락, 즉 콘텍스트적 이해가 따라야 한다고. 절대 강자의 횡포에 약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으로 말이야.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육봉기 목사에게 되묻고자 해. 당신 성추문에는 욕정 외에 다른 어떤 콘텍스트가 있는가. 없다면 몸과 마음의 정결을 운운할 자격이 없는 것이고.--- p.220 「대한민국 대표 목사와 목사아들 돼지의 종교 배틀」
김용민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 여부 논란이 불필요한 역사적 예수는 그런 화려한 영예를 마다하고 처절한 패배의 길을 보여준 주인공이야. 자신의 부활을 보게 한 사람은 극소수지만, 고난당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당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노출했어. 예루살렘 떠나가라 갈릴리 떠나가라 그 신기한 승리의 징표인 부활을 왜 모두 보여주지 않아서 1천년 동안 논란과 의심을 부른 것일까. 이적에 눈이 가려 루저의 하나님, 약자의 그리스도였던 자신이 사라질까 봐 그랬을 것은 아닐지. 어쩌면 부활하지 않은 채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청년으로서 알려져도 괘념치 않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성공지상주의, 이것은 예수와 무관해. 개신교 성장에 감동과 교훈이 적은 이유는 예수의 정신이 외면된 채 이 정체없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승리지상주의에만 매몰됨 때문은 아닐까. 이 근원도 알 수 없는 속물적 성취 논리를 버리지 않는 한, 개신교에게는 볕들 날이 없을 거야. 나의 ‘비난’은 이러한 이유에서야.
육봉기 그래서, 막말꾼 당신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이적, 육체 고난, 부활, 승천을 안 믿는다는 거야?
김용민 신자의 입장에서 나는 믿어.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놓고 고민하고 해답을 찾으려 애쓰는 노력 또한 가상하고, 그것이 지성의 종교로서 개신교가 추구할 역할이라고 봐. 문제는 이거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몸에 형식과 규율, 교리를 덧씌워 어색한 허울을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예수 그대로를 직시했으면 해. 예수의 일생은 ‘도발’의 연속이었어. 예루살렘이 아닌 변방 도시 갈릴리에서 하늘나라를 선포했잖아. 낮은 자와 어울리며 치유의 역사를 베풀었어. 성전을 정화했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사하기도 한 거지. 이 모든 것이 당대 기득권자들을 위협했던 도전이었어. 기득권자라고 따로 계급이 상존하는 것은 아니지. 누구나 기득권자가 될 수 있으며, 어느 지점 또 시점에서는 이미 기득권자일 수 있어. 그러나 기독교와 기득권이 교집합할 여지는 없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왔으나 세상 권세에 의해 살해된 예수를 믿으려 한다면.
육봉기 이제 보니까 욕설도 잘하지만 요설도 잘 늘어놓는군.
--- p.232 「대한민국 대표 목사와 목사아들 돼지의 종교 배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