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했다 하옵니다.”
“참말이냐”
“예. 회안군 방간과 박포를 모두 생포하셨다 하옵니다.”
어머니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어머니만 바라보던 우리 남매에게 달려왔다.
“다행이구나, 다행이야.”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은 울면서 어머니의 품에 안겼다. 무슨 일이 벌어진 줄 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저 어머니의 그 말에 안정이 되었는지 그제야 지쳐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2년 전,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던 그때처럼 아버지는 피범벅이 된 채 돌아왔다. 차마 묻지 못했다. 숙부인 회안군 방간은 어떻게 되었는지. 회안군 방간의 큰아들인 의령군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지만 언제나 나를 무시하지 않고 귀여워해주었다. 의령군도 난에 참여한 걸까? 설마 다른 사촌 형제들도 죽이시는 걸까? 나는 두려워 묻지 못했다. 그저 궁금했다. 왕위란 것이 무엇이기에 친혈육과도 전쟁을 벌여야 하는지.
*
“쉿!”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 대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싶었다. 아버지의 한숨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충녕대군(세종)이 첫째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른다면 만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릴 텐데.”
“첫째와 셋째가 바뀌어 태어났으면 하는 아쉬움을 말할 데가 아무 데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오늘 그렇게 혼이 났으니 이제 세자도 정신을 차리고 학문에 정진할 것입니다. 그러니 믿고 봐주소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에 침전 앞에 있던 궁녀가 바들바들 떨었다. 난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 「왕위를 버린 남자 - 양녕대군」중에서
폐출을 면했다고는 하나 기쁘지 않았습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었습니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제가 왕비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제어하지 못한 전하께 서운했습니다. 아니, 미웠습니다. 아버지는 권세를 탐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제일 잘 알고 계신 전하께서 어찌 모른 척 제 아버지가 사사되는 것을 두고 본단 말입니까?
그때부터였습니다. 체한 듯 가슴 한쪽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가슴을 쳐도 체기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태종대왕께서도, 전하께서도 밥을 들라 명하셨습니다. 임영대군 구를 임신한 몸이었습니다.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억지로 밥 한 술을 삼키면 삼키자마자 신물과 함께 도로 넘어왔습니다. 억지로 먹고 토하길 반복하다 보니 목구멍과 입이 위산으로 헐어버렸습니다. 차라리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드러누웠습니다.
*
생떼 같은 자식을 품에서 떼어놓는 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왕비여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선대의 후궁들과 전하의 후궁들까지 복잡한 내명부를 다스리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습니다. 내 새끼를 기르는 사람에게는 어떤 어미든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이지요. 아무리 미워도 제 자식을 길러주는 후궁에게는 깍듯하게 예의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을 볼모로 잡힌 채 저는 왕비로 살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을 볼 때마다 어미가 아닌 왕비여야만 했던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모자라고 보잘것없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을요.
--- 「기도 -소헌왕후」중에서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순임은 손수 만든 요깃거리를 챙겨 가지고 와서 내 옆에 살그머니 놓아두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내가 입을 저고리에 자수를 놓았다. 구석은 어두우니 내 곁으로 다가오라 이르면 새빨개진 얼굴로 조그맣게 말했다.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혹시나 소인이 가까이 다가가 저하께서 공부하시는 데 방해가 될까 저어되옵니다.”
거절하는 모습조차 어여뻤다.
다른 궁녀들은 승은을 입으면 첩지를 내려달라 조르기 마련인데 순임은 내가 은근슬쩍 얘기를 꺼내도 오히려 고개를 내저었다.
“미천한 소인은 그저 저하를 곁에서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
나는 세상 누구보다 나쁜 남자였다. 순임은 그런 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세자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순임은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돈이 많아서 사랑한 것도 아니었다. 순임은 다른 후궁들처럼 사치스러운 뒤꽂이나 화려한 장신구보다는 꽃 한 송이 꺾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회임으로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 달이나 찾아보지 않다 처소에 들른 날이었다. 원망스런 기색 하나 없이 그저 좋아서 나를 힐끔거리는 모양이 한심스럽기도 신기하기도 했다. 자존감 따윈 없는 아이라 비웃으며 물었다.
“넌 내가 한 달 만에 왔는데도 원망하는 기색 하나 없구나. 내가 그리도 좋으냐? 도대체 왜 내가 좋은 게냐”
“모르겠습니다.”
순간 심통이 났다.
--- 「나만 몰랐던 사랑 이야기 - 문종」중에서
아바마마는 대신들을 모두 선정전에 불러 모았다.
“윤씨가 흉험하고 악역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렸다. 이제 원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아바마마는 좌승지 이세좌에게 명해 어머니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에게 명해 이 뜻을 삼대비전에 아뢰게 했다. 그리고 주서 권주로 하여금 전의감에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했다.
어머니가 사사되자마자 나의 외숙부들은 곤장 100대를 맞은 뒤 윤구는 장흥, 윤우는 거제, 윤후는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외할머니 신씨는 어머니의 염장이 끝난 후 장흥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나는 어머니의 사사 덕분에 무사히 세자위에 오를 수 있었다. 나의 생모가 사사되었기에 신하들은 내가 세자가 되는 것에 대해 흠을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신하들은 차라리 세자의 생모가 죽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나는 어머니를 희생해서 내가 즉위했다는 죄책감에 잠이 들 수 없었다.
*
어제 사묘에 나아가 자친(어머니)을 뵈니
잔 드리고 나서 눈물이 자리를 가득 적셨도다
간절한 정회는 한이 없는데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라
나는 어머니를 위해 시를 자주 지었다. 그래도 억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한이 내 가슴에 박혀 날 아프게 했다. 그래서 춤을 췄다. 내가 처용무를 출 때면 손짓과 발짓에 넘쳐나는 슬픔과 좌절감에 후궁들과 기생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제헌왕후께서는 용모가 선녀와 같으셨습니다. 굳이 닮은 사람을 꼽으라면 공민왕의 왕비 노국대장공주가 가장 비슷할 듯합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알고 있는 내관의 말에 나는 노국대장공주가 그려진 초상화를 모조리 사들이라 명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구나.”
내가 그렇게 한탄하면 내관은 거울을 가져왔다.
“거울을 보시옵소서. 전하의 용안이 참으로 제헌왕후마마를 닮으셨나이다.”
하지만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아무리 많이 사들여도, 어머니를 죽인 사람들을 샅샅이 찾아내 모두 벌을 주어도 마음속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고 텅 빈 채였다. 여전히 어머니의 부재는 내 가슴을 아프게 했고, 받아보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갈구는 내 가슴을 쓰리게 했다.
--- 「붉은 적삼 - 연산군」중에서
“그대는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소중합니까?”
아버지는 단번에 그 뜻을 파악하고는 대답을 망설였다. 딸이 왕비가 되면 왕비인 누이가 폐출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성공하면 반정이지만 실패하면 역모였다. 아버지는 연산군 내내 왕실의 사돈으로 승승장구했다. 굳이 역모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믿어봅시다.”
아버지의 말에 박원종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물러났다. 아버지는 연산군에게 역모를 밀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게 몸조심하라며 주의와 경계를 당부했다.
나와 진성대군은 문을 닫아걸고 손님도 받지 않았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역모를 꾀하는 자들이 아버지에게 물은 것으로 보아 진성대군을 임금으로 세우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진성대군은 왕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나도 왕비의 삶은 싫었다. 왕비라는 자리가 화려해 보이지만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는 고모이자 윗동서인 왕비 신씨를 보면서 일찌감치 깨달았다.
*
“신씨가 입궁했습니다, 아바마마.”
인종이 귓가에 속삭이자 상왕전하(중종)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가까이 오라.”
입만 벙긋할 뿐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어수(임금의 손)를 잡았다.
“미안하오.”
겨우 내뱉은 말을 끝으로 전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전하의 용안 위로 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전하! 전하!”
인종과 중전이 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관들과 상궁들이 바삐 오갔다. 김 내관은 그 틈에 나를 데리고 궁을 빠져나왔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저 내 기억에는 전하가 미안하다고 한 바로 그 순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 「다홍치마 - 단경왕후」중에서
“이게 뭐야? 왜 제목도 없어?”
민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에 들린 서책을 도로 빼앗으려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나는 민서의 손을 피해 서책을 넘겨보았다. 희빈마마의 존함이 눈앞을 스쳐갔다.
“장옥정?”
난 놀라서 민서를 바라보았다. 민서는 포기한 듯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서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치솟아오르는 분노로 숨이 막혔다. 하지만 민서는 숨을 헐떡대는 날 비웃을 뿐이었다.
인현왕후마마와 희빈마마의 이야기였다. 아니, 그것은 절대로 인현왕후마마와 희빈마마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사실만을 옮겨 적은 것처럼 꾸몄을 뿐 철저하게 왜곡된 이야기였다. 희빈마마를 악녀로, 인현왕후마마를 선량하기만 한 피해자로 묘사한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희빈마마가 희대의 악녀라고 생각할 터였다.
“당장 희빈마마께 고할 거야. 어떻게 감히 이런 거짓을 지어낼 수 있어?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
“아니네. 다른 이를 찾을 필요는 없어. 난 그냥 원미에게 맡기겠네.”
“하지만 마마, 중전마마 쪽에서는 매설가를 쓰는데 저희는 검증되지 못한 매설가 지망생을 쓴다는 것이 염려스럽나이다.”
“좋아하는 사람보다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나는 잘하는 사람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을 쓰고 싶네. 게다가 글의 제목이 마음에 드네. 《장옥정전》이라……. 그런데 왜 《희빈 장씨전》이 아니고 《장옥정전》이라 지었느냐?”
“저한테는 언제나 중전마마셨습니다. 그리고 곧 다시 중전마마가 되실 겁니다. 그래서 희빈이라는 직첩을 쓰기 싫었나이다. 실록에는 왕비일지라도 여자의 이름을 남기지 않고 성씨만 남긴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마마의 존함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숙원, 소의, 희빈 등 직첩이 아니라 마마의 존함과 인생을 후세에 알리고 싶었나이다.”
“맘에 드는 이유로다. 참으로 기특하구나. 좋다. 내 특별히 너에게 내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하지. 나도 내 인생을 글로 남기고 싶구나. 후세에도 억울한 인생으로 남고 싶지는 않으니.”
--- 「장옥정전 - 궁녀 김원미」중에서
너와 만난 지 칠백 일, 내 나이 열여섯. 친구들이 시집을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널 죽어라 반대했다.
사흘에 한 번씩 땔감을 해다 주고 어쩌다 돈이 생기면 돼지고기도 사다주고 하며 넌 어떻게든 어머니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지만,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널 맘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아마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의 본능이었던 것 같다.
“왕족? 웃기지 말라고 해. 내 알아보니 그놈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인 이광의 서자라면서? 사도세자도 영빈 이씨 소생이니 서자이고, 그 아비인 영조도 숙빈 최씨 소생의 서자이니 결국 서자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의 서자가 되는 셈인데, 그것도 왕족이랍시고 점잖게 굴려는 꼴이 얼마나 우습던지. 게다가 그냥 몰락한 양반 가문도 아니고 두 번이나 역적으로 몰렸다면서? 천주교인지 뭔지 믿다가 집안 여자들도 몇이나 죽었다던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원범이 그놈은 안 된다. 비루먹은 말처럼 바싹 마른 데다 사팔뜨기인 놈이 뭐가 좋다고 그놈한테 시집을 가겠다는 거냐? 차라리 노처녀로 늙어 죽는 꼴을 보는 게 낫지.”
어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혼처 자리를 내밀었지만 난 이를 악물고 어머니를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맘대로 해라.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그만인 게지.”
어머니는 눈물로 호소하기도, 막무가내로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결국 한숨을 내쉬며 포기하고 고개만 내저었다.
*
“네가 강화도령이 혼인을 약조했다는 천것이냐?”
대답하지 않았다. 왕에게도 예의를 갖추지 않는 사람에게 내가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예, 봉이 이것이 전하께서 혼인을 약조했다는 아이 맞습니다요.”
날 부르러 왔던 돌쇠아범이 굽실거리며 대신 대답했다.
“수더분하니 그냥 평범한 천것처럼 생겼는데?”
“평범은 무슨! 못생겼구먼!”
“어디 강화도령이 이것저것 가릴 처지였겠소? 그저 치마만 두르면 쫓아다녔겠지. 그나마 저것 정도 되니 사귈 수 있었겠지.”
“저것 어미가 그리도 혼인을 반대해 몇 년이나 사귀었지만 결국 혼인하지 못했다지.”
양반들은 낄낄대며 너와 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리 와서 술 좀 따라라.”
“어디 술만으로 되겠소? 전하께서 비비셨다는 살맛 좀 보셔야지.”
--- 「첫사랑 - 봉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