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방금 식사를 마친 식탁 앞으로 다시 다가설 때만 해도
또 ‘밥 먹자’고 말하는 줄 알았다.
아내는 요즘 들어 밥을 먹고 나서 바로 밥을 달라고 하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내의 얼굴에는 오늘따라 생기가 가득했다.
요 며칠 사이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구나.”
‘좋겠구나’라고?
갑작스러운 반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처음 접하는 상황이었기에 혼란스러웠다.
‘터질 것이 결국 터진 것인가?’
뒷머리 쪽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승수야, 오늘 나랑 어디 좀 다녀와야겠다.”
상황판단이 안 됐다. 아내가 이어가는 말은 갈수록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갑자기 ‘승수야’라니?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 「1부」중에서
오빠가 칼질을 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녁밥을 짓는 중인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오빠가 밥을 짓고,
나는 그 밥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였더라.
그러니까, 내가 만든 반찬에 문제가 생기고부터였던 것 같다?
요즘 밥도 오빠가 짓고, 반찬도 오빠가 만들고, 보리차도 오빠가 끓인다.
설거지라도 내가 하겠다고 하지만, 오빠는 모두 자기가 하겠다고 한다.
요즘 오빠는 요리를 아주 잘 한다.
예전에 우리가 먹던 그 반찬 그대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그런지 내 입에 참 잘 맞는다.
그런데 내가 오빠를 승수라고 불렀다고? 내가 오빠를 승수로 착각했다고?
내가 대전에 가자고 그랬다고? 내가 00대학에 가자고 했다고?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건 다 뭐지? 이 노트에 적혀 있는 것들은 다 뭐지? 날짜가 있네.
2월 29일, 오늘이네. 그렇다면 일기장? 분명 오빠의 글씨다.
--- 「1부」중에서
“오빠, 집이 어디예요?”
돌아보니 유진이었다.
늘 말이 없이 간간이 노트에서 눈길을 들어 창밖을 보곤 하던 후배.
“응, ○○동.”
“그래요? 우리 집도 그쪽인데 우산 없으면 같이 가요.”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오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제 글을 읽어봐 줄 수 있어요?”
“응?”
“내가 쓴 글을 읽고 느낀 걸 이야기해줄 수 있어요?”
“그럴까?”
그 뒤로 유진은 나를 만나면 자신의 노트를 나에게 슬그머니 건넸다.
그 노트에서는 옅은 코스모스 향기가 났다. 나는 그걸 느꼈다.
유진은 나의 코스모스였다.
코스모스의 노트는 늘 코스모스를 가득 품고 있었다.
그래서 노트를 열면 코스모스 향기가 가득 퍼졌다.
나는 노트에 코스모스가 쓴 글에 대한 느낌을 세세하게 담아서 돌려주었다,
그렇게 단순하게 시작됐다. 우리의 교환일기는 특별한 목적도 방향도 없었다.
맑은 가을날 길가에 핀 코스모스.
사람들은 그냥 스치기만 할 뿐 아무도 구체적인 눈길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나의 코스모스를 매일 살폈고, 물을 줬다.
“네 삶이, 네 생각이 여기에 다 보이는데 괜찮겠니?”
“응. 오빠니깐”
코스모스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이후 코스모스는 자신의 노트에 그날그날의 삶과 생각을
꼼꼼하게 적어 나에게 보여줬다. 코스모스의 노트는 맑은 샘과 같았다.
그건 청춘의 심연이었다. 나는 그 심연에 매일, 깊게 빠져들었다.
--- 「1부」중에서
사실 아내의 교환일기 제안은 반가운 일이었다.
아내에게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나는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의사와 전문가를 만났다.
아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한 의사는 환자에게 일기장을 선물하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일기쓰기가 이 병의 진행을 막는 데 아주 좋습니다.
일기를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상’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회상이라는 과정을 통해 뇌를 활성화할 수 있거든요.
게다가 일기를 쓰려면 먼 과거가 아니라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단기회상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주 좋습니다.”
아내에게 그날 있었던 일 가운데 중요한 일을 골라 있는 그대로 적기로 했다.
내가 쓴 일기를 보면서 아내가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해낼 수 있도록.
가능하면, 누군가와 나눈 대화까지 그대로 옮겨 적어서
아내가 그날그날의 일을 기억해 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1부」중에서
현도안 선생님이 입원했다는 소식, 선생님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소식은 아내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아내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승수야 우리 선생님 너무 멋지지?”
아내는 얼마 전부터 나에게 그 사진을 보여줬다.
중학교 졸업 후 선생님과 함께 찍었다는 그 사진이었다.
사진은 흑백이었지만, 그 사진 속 아내는 역시 코스모스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큰 키. 영락없는 코스모스였다.
아내는 내가 알기 전부터 코스모스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으로 처음 본 젊은 시절의 현도안 선생님은 다부진 인상을 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강단이 있어 보였다.
현도안 선생님은, 한 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잡은 채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 「1부」중에서
“약을 제대로 안 먹으면 큰일 나요. 약을 먹어야 빨리 병이 낫지요.”
아내는 자주 그런 말을 했다. 아내는 철저하게 약에 의지했다.
이 약만 제대로 먹으면 병이 다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의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는 아내는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내는 약을 보다 철저하게 먹음으로써 병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아내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약을 더 먹는 일이 잦아지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극심한 위장장애를 호소했
다. 약에 위장을 보호하는 약을 함께 처방했다고는 하지만,
약을 과다복용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위장장애도 그만큼 늘어났다.
어느 날부터는 약을 먹을 때는 반드시 내가 챙겨주기 시작했다.
아내에게만 맡겨놨다가는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챙겨준다고 해도 아내의 약 과다복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나 역시 좀 전에 아내가 약을 먹었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약 달력’
누가 방법을 하나 가르쳐줬다.
고령자가 사는 집에서는 흔히 약달력을 만든다면서,
약 달력을 만들어볼 것을 권유한 것이다.
--- 「2부」중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는 술상을 가운데 두고 승수와 마주 앉았다.
아마 처음 있는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수는 힘이 들었지만 재미있었다는,
유학생활에서부터 며느리를 만난 과정까지 상세하게 들려줬다.
바닥을 드러내는 술병이 늘어났다.
모처럼 아들을 만난 즐거움에 마음껏 취했다. 그때였다.
“아버지,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응, 뭔데?”
“돈을 좀 해주셔야겠어요.”
내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래 돈이 왜 필요한데? 그리고 얼마나 있으면 되는데?”
“네, 당장 살 집이 좀 필요해서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얻은 원룸인데 세 식구가 살기에는 너무 좁거든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막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돈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그래 승수야, 우리가 돈 해줄게. 이 집 팔아서 좀 작은 곳으로 이사가면 되지.”
아내가 갑자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생각이 되돌아온 것일까?
아들과 며느리, 손녀 아이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것 같던 아내가 집을 팔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나에겐, 우리 부부에겐 이미 팔 집이 없지 않은가?
--- 「1부」중에서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줄 거지요? 나보다 먼저 죽으면 절대로 안 돼요.”
언젠가 집 주변에서 산책을 할 때 아내는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왜 먼저 죽어. 우리는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죽을 건데….”
“그렇지요? 우리는 같이 죽을 거죠?”
“그런데 우리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죽는 방법은 딱 두 가지밖에 없겠는 걸….”
아내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함께 자살을 하거나, 함께 사고를 당하거나. 그렇지 않아?”
“싫어요. 자살도 싫고, 사고도 싫어요. 그냥 둘이 우리 집 거실에서
등 대고 앉아 있다가 같이 죽어요. 햇살 좋은 날 오후쯤이면 더욱 좋겠어요.”
그랬다. 요즘 아내가 바라는 것은 나와 같이 있다가 나와 같이 죽는 것이었다.
--- 「2부」중에서
“그래서 말인데요. 저를 오빠가 죽여주세요. 오빠의 품속에서 죽고 싶어요.”
“아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죽여 달라니? 나를 살인자로 만들겠다는 거야?”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오빠를 살인자로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오빠의 손으로 죽고 싶어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조금 있으면 좋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아니에요. 오빠 품속에서 죽고 싶어요. 내가 오빠를 완전히 알아보지 못하는 그 시점에 나를 꼭 죽여주세요.”
“아니 왜 그래? 왜 그렇게 약한 말을 하는 거야?”
“부탁해요. 제발 저를 오빠 손으로 꼭 죽여주세요.”
--- 「2부」중에서
손이 떨리는 증상이 나타난 아내는 젓가락은 물론 숟가락질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몇 숟갈 떠 먹여주기는 했지만, 수제비를 먹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 사이에 구석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사람들도 나갔다. 식당에는 우리 둘 밖에 없었다. 그때 남자 한 사람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식당 여주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더니 우리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좀 빨리 드실 수 없으세요. 저도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좀 전에 있던 여주인은 식당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빨리 나가라는 얘기였다.
“여보세요. 우리 아내가 지금 식사하고 있잖아요. 밥을 파시는 분들이 식사 중에 청소를 하시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내가 먹을 수 있는 마지막 수제비가 될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식당 주인 부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우리 부부를 보고 있었고, 아내는 흔들리는 손으로 연신 수제비를 건져 먹고 있었다.
--- 「2부」중에서
바다를 끼고 해안선을 한참 내달리고 있는데 도로 한 켠에 꽤 넓은 공터가 보였다.
‘여기가 좋겠어, 여기가.’
나는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으면서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공터에 캠핑카를 세웠다. 캠핑카에서 내려서 보니 석양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와, 너무 좋아요. 저기, 저기, 저기 좀 봐요. 작은 섬이 보여요? 섬에 불이 붙은 것 같아요”
석양 속에 희미하게 드러난 작은 섬, 빠알간 석양 속 섬을 보고 아내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
아내를 뒤에서 껴안으면서 물었다.
“그럼요, 이렇게 멋진 석양은 처음이에요.”
나와 아내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해가 완전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서쪽 바다를 보고 서 있었다.
--- 「2부」중에서
나와 아내의 주요 일과는 바다나 호수를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아내는 나를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내가 하는 말은 잘 듣고 잘 따랐다. 본능적으로 내가 자신의 보호자가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인근 도시에 있는 호수에 다녀왔다. 캠핑카가 호수 주변 드라이브 코스를 내달리자, 아내는 소리까지 지르면서 즐거워 했다.
“아, 너무 좋아요.”
“그래 나도 좋아. 저기 저쪽 호수 안에 작은 섬 보여? 너무 예쁘지?”
나는 지난번 서해바다의 석양과 함께 본 그 섬을 떠올리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한동안 침묵을 이어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내의 얼굴은 점차 굳어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든 것일까? 아내의 이런 표정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저와의 약속 잊지 않았지요. 저를 죽여주세요. 당신 곁에서 죽고 싶어요.”
아내의 눈가로 눈물이 번졌다. 아내는 또 그 이야기를 했다.
“알았어. 약속 꼭 지킬게. 알았어. 걱정하지 마.”
오른 손으로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내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계속 아내에게 말을 했다.
“분홍색 코스모스가 가득 핀 들판이어도 좋겠어.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이어도 좋겠고. 담요 한 장 깔아놓고
서로 등 대고 앉아 이야기하다가…. 가을 바람을 맞으면서 말이야.”
“….”
“그래 그게 우리의 꿈이었는데, 우리가 꿔온 진짜 꿈은 그런 것이었는데….”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늦은 오후였다.
꿈속의 아내는, 아내의 목소리는
한 줌도 안 되는 연기가 공중에 퍼지듯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거실 창문 너머 먼 곳에 언덕길이 보였다.
연분홍빛 코스모스 한 떨기가 가을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쓸쓸하게, 아프게.
--- 「2부」중에서
호수 둘레 드라이브 코스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도로 옆 공터에 차를 세웠다.
전에 왔을 때 봐놓은 곳이었다.
공터는 높은 절벽 위에 있어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공터 한켠에 돗자리를 펴고, 아내와 함께 그 위에 앉았다.
“우리 등 대고 앉아볼까?”
“….”
“내 등에 당신 등을 대고 앉아봐. 서로 반대쪽을 보고. 당신 뒷머리를 내 뒷머리에 대면 더 편하겠어.”
아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옆으로 돌아앉더니, 나의 등에 자신의 등을 댔다.
“머리도 한 번 대봐. 편안할 거야.”
“….“
아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등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평생 나를 지켜주고, 지탱해준 아내의 그 온기,
그 따스함이 실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흘렀다.
그랬다. 나는 아내의 이 온기 덕분에 지금까지 살았고, 오늘을 살고 있다.
아내의 이 온기 덕분에, 이 온기의 힘으로 회사에도 다녔고, 세상과 싸울 수 있었고, 아이도 키웠다.
요즘은 이 온기 덕분에, 이 온기의 힘으로 아내를 지킬 수 도 있었다.
요즘 아내가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지만, 아내의 온기는 변함이 없다.
여전히 내 몸으로 흘러들어와, 나를 지켜주고, 나에게 힘을 준다.
‘등 대고 졸다가 같이 죽어요, 우리.’
언젠가 아내가 했던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 「2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