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영적인 삶에 대한 글을 써 달라고 한 이후로, 나는 자네가 내 편지를 다 읽었을 때 정말 꼭 기억하길 바라는 한마디가 있는지 계속 생각해 보았네. 지난 한 해 동안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특별한 단어가 서서히 떠올랐지. 바로 ‘사랑받는 자’라는 단어였네. 난 그 단어가 자네와 자네 친구들을 위해 내게 주어진 단어라고 확신하고 있네.…수많은 대화 덕분에 난 이런 확신을 갖게 되었네. 바로, 어떤 특별한 전통에 속해 있든 아니든 간에,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이 말은 모든 인류를 향한 가장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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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말뿐이네. 또 내가 바라는 것은, 자네가 사랑만이 지닐 수 있는 온유함과 능력으로 자네에게 주어지는 이 말씀을 듣게 되는 것뿐이네. 나의 유일한 소망은 자네의 존재 구석구석에서 이 말씀이 울려 퍼지는 것이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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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무 소용도 없고 추한 사람이야. 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야. 비열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지금과 정반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말이야.”라고 외치는 목소리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걸세.
이런 부정적인 목소리는 너무 크고 끈질겨서 그대로 믿어 버리기 쉽지. 그것이 위험한 함정이네, 바로 자기 거부의 함정!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우리 삶에서 가장 위험한 함정은 성공이나 명예, 권력이 아니라, 자기 거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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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자제는 자기 거부보다는 교만이라는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 그러나 사실 교만이란 것도 자기 거부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 아니겠는가? 교만은, 자네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기 싫어서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분석해 보면 교만은 무가치감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 자기 거부나 교만은 둘 다 우리를 인간 존재의 공통적 실제에서 벗어나게 해서, 그 모습에 이른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지. 나는 내 교만 밑에는 수많은 자기 회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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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생동하는 모든 것에서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그 진리를 구현하는 것이네. 그것은 그 진리를 삶으로 드러내는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한다네.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개념이 나의 삶을 장식한 아름다운 생각이나 고상한 개념에 지나지 않아서 내가 낙담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만 한다면, 실제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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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받고, 나누어 주는 사람들인 우리는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네. 그것이 사랑받는 자의 삶이라네. 즉 우리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인 양 계속
해서 세뇌시키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아 내야 할 삶이지.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이면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경력을 쌓고자 하는 욕망, 성공과 명예에 대한 기대, 명성을 떨치고 싶은 우리의 야망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것은 무시되어야 하나? 이러한 포부들은 영적인 삶과 반대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그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지도 모르네. 그리고 자네에게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대도시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고 영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으라고 충고할 걸세. 그러나 나는 그것이 자네의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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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하게 된다네.…내가 말하는 변화란, 자네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사랑받고 있다는 진리에 끊임없이 ‘그렇습니다’로 지속적으로 반응하며 사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이네. 삶이란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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