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어떨 때는 꿈에서도 글자들이 나타났다. 눈앞에 문장들이 책처럼 쫙 펼쳐지는 것이다. 모두 멋진 문장이었다. 여태껏 그토록 완벽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눈을 뜨면 문장이 한 줄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로 옮겨보려 몇 번 시도한 적이 있는데 정리하려고 보면 수첩에는 모호한 단어들 몇 개만 적혀 있었을 뿐이다. 거기에 왜 그런 단어들이 적혀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꿈속에 본 문장은 적어 낼 수는 없더라도, 벌건 대낮에 생각나는 것을 적어나가는 것은 가능하다. 생각을 요약해서 적기. 나는 짧은 문장으로 적어 나갔고, 관련되는 내용을 기호나 그림으로 나타냈다. 중요한 단어는 별표나 동그라미를 쳤다. 하지만 나중에 수첩을 읽어보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화가 난 나는 수첩을 어딘가에 처박아버렸다. 지금쯤 책상 서랍 속, 어딘가에 뒹굴고 있을 것이다.
--- 「불멸」 중에서
그는 나를 사랑했고 소설을 사랑했고 불멸을 꿈꾸었다. 참 잘 쓰셨네요! 그녀 한 마디를 듣고 싶어 한 그였다. 등단작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려고 바라보던 시선, 혹 칭찬의 말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말없이 읽고 책장을 덮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묵살한 것이다. 예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섭섭했을 것이다. 왜 한 부분이라도 괜찮다고 말해 주지 못 했을까. ‘아, 너는 모질고 인색했다.’ 그것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중략)…그 남자를 상상해 본다. 그는 이마를 양 무릎 사이에 처박고 십자가 앞에 몸을 움츠린 채 엎드려 있다. 그는 무슨 기도를 드리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기도를 했는가를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것은 알 수 있다. 불멸. 그는 이 말을 원했다.
--- 「불멸」 중에서
“우리, 어디로 갈까?”
미경이 속삭였다. 막연히 걷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어디 여관이라도 들려서 쉬었다 가자고 말하기엔 쑥스러웠다.
“네가 가고 싶은 데로.”
미경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육교 계단을 오르던 미경이가 멈추어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 나랑 같이 있고 싶어?”
미경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녀는 웃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았고 나는 육교 건너편에 깜박이는 불빛을 향해 눈짓을 했다.
--- 「미경이」 중에서
강만길은 며느리 주위에 나쁜 놈들이 넘볼까 봐 눈알을 부라리고 살폈다. “어느 놈이고 잡히면 망신을 주거나 죽여버린다”고 벼르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순덕에게 호감을 가진 동리 젊은이들은 강만길 눈이 무서워 순덕에게 접근을 못 했다.
“그놈의 영감탱이가 며느리를 누가 잡아먹나?”
“지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던데.”
“젊은 며느리를 생과부로 만들려고 한심한 늙은이 같으니라구.”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소문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무도 순덕언니 근처에 가기를 꺼릴 뿐 아니라 집적거리는 일은 엄두도 못 냈다. 다음 해 겨울 순덕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갔다.
봉구씨는 순덕언니 가족과 서로 돕고 살던 처지라 섭섭해서 눈물을 삼켰다. 강만길은 봉구씨와 며느리와의 관계가 다소 수상했지만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다. 봉구씨는 순덕이 떠나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들의 이사를 도와주기로 한다. 그들 가족이 안착한 곳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하꼬방 단칸방이었다.
--- 「아모르, 아모르 미오」 중에서
그가 갖고 있는 책은 특이했다. 모두 같은 위치에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더러는 황금색의 직인도 눈에 띄었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보고는 그가 옆에서 설명을 곁들였다.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책(冊) 도장’을 찍는다는 그는 자신의 책이자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증표로 책에 도장을 찍는다고 했다.
“‘책 도장’이 뭔가요?”
“장서인(藏書印), 장서표(藏書表), 서화인(書畵印) 같은 걸 말합니다. 일종의 스탬프 같은 걸로 장식 등을 목적으로 책에 찍거나 책에 붙이는 겁니다. 장서인에는 자신의 이름이나 글귀 등을 새기고 서화인에는 그림을 곁들입니다. 손으로 책에 눌러 찍어요.”
--- 「책도둑」 중에서
어느 날, 남편과 경수가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오전에 시작한 바둑은 점심때가 지나도 끝날 줄 몰랐다. 둘은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며 바둑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배가 고파서 허둥지둥 부엌에서 한술 뜬 밥이 식중독인지 체했는지 위경련이 일어났다. 허리를 펼 수도 없이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복통이었다. 장롱 서랍에 있는 진통제를 찾아 먹었다. 오래 묵은 약인지 모르고, 약국에서 진통제라고 해서 사다 둔 약이었다. 나는 일 년에 한번쯤 위경련이 앓았다. 그때 먹다 둔 약이었으니 일 년은 지났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난 이후로 배가 빵빵하게 부풀더니 구토가 나오고,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한 시간을 굴러도 그놈의 바둑은 끝나지 않는다. 보다 못한 경수가 한마디 한다.
“아저씨, 아줌마가 아프다잖아요. 그만두시지요.”
경수의 말을 남편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아마도 “저러다 낳겠지” 생각했는지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디다,”고 여겼는지 태평한 얼굴이다.
--- 「시간 여행자」 중에서
나는 단 한 사람, 당신의 몸 지도를 갖고 싶어요. 해부도가 아닌 감정지도. 나만의 사랑의 칩, 아무도 모르게 나 아니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불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칩을. 그 칩을 숨기려고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중략)…미로 씨 나는 아무리 얽힌 미로라도 찾아내고 말거예요. 난 내가 생각한 것을 한 번도 물러선 적이 없거든요. 당신이 아무리 도망을 쳐도 결국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주문을 외우고 기다리노라면 나타날 것이거든요.
--- 「미로」 중에서
처음으로 필드에 나갈 때 당신은 속으로 말했다. 세상을 향하는 첫 걸음이라고. 필드를 무서워하지 말고 두려움이 없애야 한다고. 춤을 추기 위한 플로어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중략)… 필드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이며 터닝 포인트.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놀라운 에너지를 가진 당신은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제 당신이 필드에서, 세상의 중심으로 날아오를 차례다. 노트북이 든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당신은 지하철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 「자존감 수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