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을 넣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게임에서는 그런 고민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Continue?라는 물음 아래 10초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 그동안 이 잔인한 게임을 계속할지 말지 결정해야만 한다. 물론 실전인 인생에서는 결정권이 없지만, 그래서 지금까지는 망설임 없이 동전을 넣어왔지만. 왜인지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1까지 기다렸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동전을 넣어도 나쁠 것 없어 보였다.
--- p.15-16, 「소속 없음」 중에서
이틀째가 되니 조금은 수월하게, 그리고 더 깔끔하게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옷을 벗고 이번에는 멀쩡하겠거니 살펴보니 웬걸, 옷 뒤가 더러워져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앞모습에만 신경쓰다, 정작 내가 챙기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고로움을 외롭게 내버려두었다. 세상은 의외로 수고롭다는 말에 인색하다. 잘했다는 칭찬보다 수고했다는 다독임이 그리워지는 나날들의 연속이다. 등에 묻은 반죽의 흔적으로 내가 겪은 희끗한 수고로움의 크기를 아주 조금이나마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제야 등뒤가 보였다.
--- p.28-29, 「기왕이면 뒷치마도 부탁드립니다」 중에서
좋은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 필요하고, 위로를 주는 사람에게도 위로를 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글을 쓰는 작가가 필요하다고. 좋은 사람인 형에게는 힘이 되어줄 또다른 좋은 사람이 필요할 뿐이라고. 가만히 되뇌어보니 나에게 해줘야 하는 말이었다. 한 번씩 전원을 끄고 물을 다 비워낸 다음 깨끗하게 씻어줬어야 했다.
--- p.34, 「세척기도 세척이 필요하다」 중에서
“맛은 있는데, 배가 불렀나보다.”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어 있는 결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조용히 설거지를 했다. 사장님은 그저 자신의 할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사장님은 손님이 음식을 남겼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이 만든 음식에 대한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음식의 맛에는 이상이 없으니 남겨진 것에 대한 책임은 사장님의 소관이 아니었다.
--- p.44, 「배가 불렀나보다 하고 말았다」 중에서
그들은 언제나처럼 부모라는 이름의 유통기한이 지났음에도 소비기한이 있으니 자신들을 더 써먹으라 아낌없이 내어준다. 선배, 후배, 동료, 부하, 직원이라는 역할을 우리들처럼 소화해내야 하면서, 부모라는 역할은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자식새끼의 유통기한은 왜 그리도 짧고, 또 쓸모없는지. 밥을 먹고 길을 걷는 와중에도 틈틈이 자책이 밀려오는데,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아직은 다른 이름의 역할들을 수행해내는 게 너무나도 벅차서 도저히 자식의 소비기한만큼 써먹으라는 기약 없는 말 따위를 할 자신이 없다.
--- p.62, 「자식의 유통기한」 중에서
매일 걷던 길을 거닐며 어느새 곁에 나타난 그림자를 지긋이 바라본다. 저녁이 되어 길게 늘어뜨려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피노키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하고 싶은 관계보다, 하지 말아야 할 관계에 대해 되새긴다. 나를 양보하지 말자. 나는 나랑 먼저 친했다.
--- p.82, 「나는 나랑 먼저 친했다」 중에서
먼저 잘 닦은 동그란 트레이에 종이 포일 한 장을 예쁘게 올려준 뒤 사장님이 치킨을 담으면 메뉴에 따라 갖가지 토핑을 적절한 위치에 올려준다. 예를 들면 눈꽃치킨에는 파슬리와 치즈가루를, 간장치킨에는 아몬드와 마늘튀김을 골고루 뿌려준다. 늘 그렇듯 받는 입장에서 주는 입장이 되고서야 이 간단한 음식 하나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담겨 있는지를 깨닫는다.
--- p.118-119, 「인증샷」 중에서
“요즘은 뭘 해도 재미가 없네. 심지어 게임을 해도 그저 그래.”
“왜 그러는 거 같은데?”
“몰라.”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나?”
장난으로 툭 던진 말이었는데, 막상 생산적인 일이 대체 뭘까 궁금해졌다. 내가 학교를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늦은 밤에는 꾸준하게 글을 쓰는 것을 생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는 걸까? 그도 그가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낸다면 그건 생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는 걸까?
--- p.171-172,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나?」 중에서
나에게 치킨집은 하나의 공간 그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또다른 누군가 나의 빈자리를 채우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있었음을 잊어버릴 만큼 잘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나 없이는 안 될 거라 확신하더라도,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겠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니까. 무슨 일 있었냐는 듯 고요하게 흘러갈 것이다.
--- p.199, 「처음과 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