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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일터, 그 후

빼앗긴 일터,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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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9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318쪽 | 422g | 크기확인중
ISBN13 9791195353941
ISBN10 119535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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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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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끌까끌한 보릿단과 가벼운 벼이삭 자루, 뒷산의 좁은 산길을 땔나무를 이고 오던 기억에는 늘 할머니가 있다. 오늘은 꼭 기성회비를 가져가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버티고 서 있는 나를 회초리로 쫓다 못해 결국 고쟁이 춤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주던 이도 할머니였다. 쇠죽 끓이는 아궁이에 구운 고구마를 미끼로 아침의 단잠을 깨우고, 동네 강변에 판을 벌린 가설극장에 나를 슬쩍 보내주던 할아버지의 기억은 따스하다. 허우대 좋고 호인인 할아버지는 낭만도 있었다. 거름지게에 진달래를 한 아름 얹어 와 항아리에 물을 채워 꽂기도 했다. 할머니는 일부러 그러는지 온 산에 지천이어서인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나는 장독대 앞자리를 차지한 진달래 항아리가 좋았다.
---p.18

졸망졸망한 자식들에 가진 거라곤 시골 논 한 뙈기에 마룻장만 한 밭 두엇이었으니 아버지는 아득했을 것이다.(...) 한 달에 서너 번은 만취하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보다 남은 가족들 걱정에 눈물을 흘린 나는 술 같은 건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술만 마시면 “앞앞이 말 못하고 철천지에 한이구나” 염불 외듯 하던 아버지처럼 ‘한 많은 세상’에 ‘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어느새 나는 술자리를 잘 만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p.118~119

대우병원 영안실 앞에는 446개의 촛불로 만든 ‘열사여 부활하소서’가 타올랐다. 스물한 살, 스물네 살의 이들도 (...) 대우조선에 입사했을 때는 자부심이 있었을까. 옥포만에 띄운 시운전 직전의 거대한 시추선들이 아름답고 자랑스러웠을까. 웅장하고 정교한 선박을 완성해가는 동안 부서지고 짓이겨지는 자신들의 육신과 존엄성이 절망스러웠을까. 대규모 해고로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이불보따리를 짊어지고 쫓겨나가는 것을 보고 냉가슴 앓으며 자조하고 절망했을까. 87년 노동자대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이석규의 핏자국 위에 노조 깃발이 꽂혔을 때는 희망도 솟았으리라.
---p.160

마흔아홉 살 딸이 상기되어 노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대학 합격했어.”
“아이구 그랬나? 잘했다. 오냐 오냐, 부모 복은 없어도 네 복으로 하거래이…….”
짧은 말을 비명처럼 토한 엄마는 말끝이 갈라지더니 갑자기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가슴에 쏴아 물결이 일었다. 엄마의 심장소리가 찌르르 전해졌다. 몇 달 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고 전화했을 때도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며칠 후 엄마는 여동생의 계좌로 백만 원을 보내왔다. 엄마가 지닌 현금의 전부였을지 모른다. 그 돈이면 대학 등록금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 눌러온 욕망을 엄마의 등록금 지원으로 포장하며 등록을 강행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이기적인 선택이자 최고의 휴식이었다.
---p.200~201

원풍 식구들은 박장대소하다가도 감정이 차오르는지 손수건을 꺼냈다. 최고의 관객 앞에 선 탈춤팀은 고무되었다. 삐걱대는 다리에 더 힘을 주고 한삼 낀 양팔을 한껏 흔들었다. 극의 완성도나 어설픈 연기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본을 손에 들고 더듬거리며 읽거나 탈이 답답하다고 벗어던져 버리거나 관광버스 안에서나 볼 법한 춤들이 우스워서 더 즐거워했다. 막이 내린 뒤 원풍동지회의 2세와 갓난쟁이 3세까지 제 엄마 아빠 팔에 안겨 무대에 올라왔다. 화면에 뜬 원풍노래를 따라 다듬지 않은 화음들이 울퉁불퉁 어울렸다.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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