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일으키신 가장 영광스러운 운동의 하나로 꼽히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했다. 그해 4월 3-5일, 2년마다 열리는 ‘복음연합’(Th Gospel Coalition, TGC) 전국 콘퍼런스가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했고, 당시 만 명이 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참석했다. 그 콘퍼런스에서 강사들이 위대한 종교개혁의 서신인 갈라디아서를 한 장씩 맡아 설교했고, 그 설교들을 요약하고 중요한 서론을 덧붙여 이 책을 출간했다. 종교개혁의 풍성한 복음을 누리고 싶은 다음 세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갈라디아서를 충실하게 해석하고 적용할 자료를 목회자들과 교사들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다.
--- 「시작하는 글」 중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말한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들을 다룬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의 핵심을 제시하고, 이신칭의가 무슨 뜻인지 말하며,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루터는 바로 그 이신칭의에 의해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옳다. 사람이 어떻게 정죄를 받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로 답한다.
--- 「1장. 복음을 위한 바울의 열심(갈라디아서 개요)」 중에서
루터에게는 거짓 사도들이 ‘복음 더하기 율법’을 전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불필요한 무언가를 더함으로써 그분의 가르침을 훼손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언가를 더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충분치 않다고 내비침으로써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 「2장. 복원되어야 할 통찰과 적용(종교개혁자들의 갈라디아서 해석)」 중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외친다. 저주를 안기는 자들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이런 일이 당신의 교회와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다. 당신의 교회와 가정이 매일 이런저런 ‘복음들’에 노출되고 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당신의 교회와 가정이 더없는 보화, 곧 그리스도를 떠나고 은혜에서 떠나라고 유혹받고 있다.
--- 「3장. 다른 복음은 없다(갈라디아서 1장)」 중에서
로마 교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 의롭다함을 얻지만, 이것은 신자 안에 주입된 의라고 가르친다. 프로테스탄트라면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부를 것이다. 루터는 우리가 먼저 의롭다함을 얻고, 그다음에 우리의 선한 행위가 따른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한 행위’는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이라는 높은 기준을 절대로 통과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로마가톨릭 신학자는 이렇게 반박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은 법적 허구를 가르치고 있다. 어떻게 사람이 실제로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여겨질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루터는 짧지만 멋진 라틴어로 답했다.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
--- 「4장.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갈라디아서 2장)」 중에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 됨’을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기술한다. 즉 “성령을 받은 것”(2절), “듣고 믿음”(2절),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7절),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음”(9절), “성령의 약속을 받음”(14절), “약속을 믿는 자”(22절),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27절), “그리스도로 옷 입음”(27절), “그리스도의 것”(갈 3:29), “아브라함의 자손”(29절),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2, 9, 14, 22, 26-29절 참조) 등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믿는다”, “믿음이 있다”, “신뢰한다”이다. 즉 성도들은 하나님과 복음과 약속과 그리스도 예수를 믿거나 신뢰해야 한다(6, 8, 22, 26절 참조).
--- 「5장. 성경을 들으라! 약속을 받으라! 그리스도를 믿으라!(갈라디아서 3장)」 중에서
정한 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시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주사 우리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성부께서 구속을 의도하셨고, 성자께서 이 구속을 유효하게 하셨으며, 성령께서 이것을 적용하심)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구속해 우리가 노예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이었다.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영광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것을 자유로 경험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에서 하시는 일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은혜로 하시는 일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보내셨기에, 우리는 마음으로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내가 이곳 외에 있고 싶은 곳이 없는데 어떻게 이것을 노예살이로 보겠는가?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다.
--- 「6장. 우리는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갈라디아서 4장)」 중에서
형제자매를 섬기는 사랑은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으로서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성취한다. 형제를 섬기는 사랑 안에, 형제를 물고 뜯는 자기 의와 분열의 영의 해독제가 있다(갈 5:15).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교리다.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언제나 “당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사용하라”는 뜻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사를 사랑으로 돌보는 자유로 부르심 받았다. 그들의 필요를 보라. 그들의 필요를 섬기라. 당신은 자유하는 복을 받았다. 이제 그 자유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돼라.
--- 「7장. 복음의 자유, 복음의 열매를 추구하라(갈라디아서 5장)」 중에서
세상의 많은 사람이 종교를 나쁘지 않게 생각한다. 도덕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종교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살도록 돕는다는 이유다. 그러나 십자가 교리는 거북해한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도덕적 시궁창에 빠지지 않으려고 평생 노력해 온 우리가 시궁창에 빠져 사는 자들과 영적으로 똑같다고 말하는 건가요? 양쪽 다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건가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혹은 이렇게 말한다. “착하게 살고, 모든 면에서 도덕적이며, 다른 종교를 믿는 선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 잃어버린 자라는 건가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북하다.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다면, 이 문제와 씨름해 보지 않았다면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 「8장.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디아서 6장)」 중에서
나는 할례를 받은 사람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를 만나지 못했고, “나는 반율법주의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나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가 현대를 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바울의 논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그의 복음이 우리가 접하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구체적 형태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논리는 절대로 쉽게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노력은 풍성한 성경신학을 낳고, 모범적 목회전략을 제시하며, 모든 형태의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에 대응하도록 준비시켜 준다. 갈라디아 교회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었고, 그것이 바울에게 깊이 영향을 미쳤다(갈 1:6, 3:1, 4:15, 17, 19, 5:7).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 그는 복음의 밖에서부터 일하지 않고 안에서부터 일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복음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9장.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로부터 자유한 삶(갈라디아서 적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