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9/10 조창완(chogaci@hitel.net)
아버지라는 위치가 낡아빠진 가부장제 관습과, 도대체 그 제도란 것이 씨도 먹히지 않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아버지는 무엇일까. 온라인을 통해 고스란히 월급이 들어오고, 회사에서는 상사에 쪼들려 살지만 마음속으로 울고 싶을 때조차 눈물 한번 제대로 흘리지 못하다가 마흔이 가고, 쉰이 가면, 아이들은 자신이 생각지도 못하는 곳에서 자신의 세대를 힐난하는 시대에 사는 것이 지금의 아버지일 것이다.
하지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의 아버지는 최소한 그 누추한 권위를 두고, 권위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위치가 주는 권위의식에 충실하기 위해 삶의 신산삼을 가장 전방위에서 겪어야 했다. 거기에 그들의 세대에는 한국전쟁이라는 커다란 상처의 기억과 박정희시대라는 마냥 칭찬할수 많은 없고, 또 마냥 비난할 수 없는 애매한 시대에 살았다.
내 아버지도 그러했다. 나에게 커다란 바람막이와도 같았던 아버지는 나의 정체성의 상당부분을 만드셨다. 흠잡을 때 없는 분이지만, 나이가 들어가시면서 자신들에게 마음껏 해주지 못했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신지(실제로는 그 이상 해줄 수 없을 만큼 자식들에게 베푸셨는데도) 욕심이 늘어가는 아버지가 가끔은 싫을 때도 있지만, 난 아버지의 또다른 분신임을 너무나 잘 안다. 그리고 아버지는 최근 한달 사이에 위독하신 지경에 이르렀지만 회복되셔서 어제 퇴원했다. 자식을 타국으로 보낼 때의 쓸쓸함을 안고 계시는 아버지는 통화 때마다 내 걱정을 하실 뿐이다.
내 아버지만이 아니라 세상이 빈곤했고, 세상이 혼란했을 때, 아버지가 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암팡지게 살면서 처자식을 꾸리는 일이다. 그런 아버지들은 우리 문학에서도 주된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만만치 않은 이야기꾼 이명인이 쓴 '아버지의 우산'(문이당 간)속에 아버지는 한국에서 살아온 전형적인 모습의 아버지다.
자신이 가진 천부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싸전을 통해 부를 일구는 아버지. 단순히 싸전을 통해 돈을 일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노동력이나 기반이 있다면 이를 100% 활용해 부를 만드는 이가 화자의 아버지다. 그 아버지에게는 각자의 삶은 살아가는 아들이 있다. 짧은 웃음거리에서부터 제법 큰 가족사까지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매끄러운 문체와 입담으로 즐겁게 읽힌다.
화자인 아들은 시쓰기를 꿈꾸지만 주변에 대학나와 노는 이들을 보고 대학이 사는데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아버지가 대학 보내기를 거부해서 아버지의 가업을 잇고 있다. 동생들은 이런 아버지에 저항해 대학을 가고, 아버지의 우산에서 우선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그물안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나중에 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어받아서는 자신에게 장사나 삶에서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 날로 무력해져가는 화자는 사실 무의지속에 살아간다. 그런 이유로 결혼에서부터 생활까지 모든 것을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간다. 반면에 둘째나 셋째, 혹은 여동생은 자신의 의지를 따라가기도 한다.
하지만 집안의 실권을 얻은 장남인 화자는 장사보다는 시인적인 기질이 생활에서 드러나면서 사업에 실패하고 도시에 올라가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부모님의 상경과 이어진 실패로 인한 충격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자신의 홈구장인 고향을 떠나온 후 삶의 의지를 상실해 무력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뒤늦게 아버지의 삶을 이해해가는 화자와의 화해가 후반부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산을 찾아다니며 자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중풍에 걸려서 돌아가시는 어머니의 임종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김정현의 '아버지'로 큰 재미를 본 문이당의 책이기에 '아버지'의 유사본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의 장점은 입담이 있다는 것과 문체가 쉽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가는 과정을 소개하는 내용 등 작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 이야기를 글로 써가는 것도 능숙하다.
하지만 작가의 약점도 적지 않게 보인다. 소설의 가장 주된 인물중에 하나인 화자는 물론이고, 소설의 주인공인 아버지 역시 인물의 특징이 소설의 끝까지 살아가지 못한다. 또한 형제들 역시 인물의 개성이 살아있기 보다는 전체속에서 이런저런 형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열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소설은 김수영시인이 이야기를 꺼내 전체 이야기에서 튀게하는 등 작가의 댄디즘이 포장되지 못하는 등 기법상의 약점도 가지고 있다.
좀 딱딱하지만 소설의 주제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도 혼돈스럽다. 이 소설은 이문구의 '유자소전'같은 인물평전 형식은 빌린 소설이 아니라 일반 장편소설이다. 그렇다면 독자들로서는 이 작가가 독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궁금하다. 그런데 이 책은 아버지의 고집스런 삶에 대한 향수로나 요약되는 지극히 빈약한 이야기 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아버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어머니나 아내같은 여성쪽의 축들은 지나치게 허약하다. 심지어는 여성작가이면서도 여성폄하로까지 볼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이런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나에게 재미있게 읽혔다. 그런 말을 할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작가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재능과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서 글을 써가기 시작한다면 좋은 작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두가지를 배우기가 쉽지 않으니. 나는 앞으로도 이 작가의 소설이 나오면 사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