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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

걷는사람 시인선-028이동
리뷰 총점8.9 리뷰 8건 | 판매지수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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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10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150쪽 | 162g | 125*200*20mm
ISBN13 9791189128869
ISBN10 1189128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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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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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너무 캄캄해. 웨이터, 웨이터, 목소리는 빛처럼 칠흑을 따라 번져 가는데, 웨이터는 없고, 목소리로만, 우리는 기다리고, 웨이터, 웨이터, 조금만 더 우리는 기다려도 되나요. 보이지 않는, 만져지지 않는 우리를, 우리가 찾아 돌아오도록, 웨이터, 웨이터, 부르면서 우리는, 웨이터, 웨이터, 다른 것이 될지도, 더 좋은 다른 것이, 될지도 모르죠.
---「Mass」중에서

과일가게는 내부수리중이라고 했다. 명백한 거짓말이다.
누런 개는 느리게 마을을 돈다. 느리고 확실하게 죽어 가고 있다.
노을은 아무것도 거두어 가지 않는다. 저녁은 자꾸 돌아온다.
병든 모과 하나가 골목길 구정물 위를 구른다. 향기가 좋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서로의 얼굴에 더 가까이 간다.
향기가 좋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을 찾아 두리번거리면
우린 그걸로 끝이다. 체리를 씻는 흰 손은 등 뒤에만 있다.
대신 우리는 키스한다. 침 냄새에 옛날이 이끌려 나온다면
우린 조금 더 늙는 셈이다. 키스하면서 우리는 느리고 확실하게
죽어 갈 수 있다. 우리의 꿈이 골목 입구를 제대로 찾는다.
---「우리는 키스한다」중에서

그가 앉아 있다
3인용 가죽 소파 한 귀퉁이에
닳고 얼룩진 매트리스 위에
바람 부는 세 발만 남은 식탁 의자에
더럽혀진 2월의 눈밭 위에
쇠로 된 시소의 안장 한 끝에
어느 빌라 에어컨 실외기 위에
골목 어귀 콘크리트 계단 가운데
멋대로 웃자란 강아지풀을 뭉개고
엉망이 된 잔디의 검푸른 물 위에
나란한 두 개의 무덤 사이에
허기진 짐승의 늑골 곁에
말들이 끝나버린 입술 아래에
불가능한 사랑의 복숭아뼈 위에
그리고 다시 소파로
그는 돌아와 앉아 있다
슬픔이라곤 처음인 손님의 얼굴로
---「앉아 있는 사람」중에서

손가락 사이로 다 보았다
물고기를 뜯어 먹는 물고기를 뜯어 먹는 접시를
뜯어 먹는 식탁을 뜯어 먹는 의자를 뜯어 먹는 엉덩이를
뜯어먹는 머리에게 시키는
손가락들이 이따금씩 엄숙하게 낄낄거렸다
---「비린내」중에서

태어나라 꺼져라 다시 일어나라
말하지 않고 모르는 얼굴로
얼굴 없는 그 명징한 얼굴로

뜨거워졌다가 식었다가
밤과 낮과 시침 사이와
오후의 모든 틈들에 있다
저곳과 여기와 아무 데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듯
폭 넓은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
입속 깊이까지 줄 서 있는
말들을 향해 인사 건네는

도처의 치마 안쪽에서
지치지 않고
마중 나오는 눈빛들

한 줌의 낭비도 없이
공중에서 만나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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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음의 첫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는 한 여성 주체가 어떻게 자기만의 인식과 목소리를 얻게 되는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통과제의와도 같은 시집이다. 부재와 고독 속에서 누구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기다린다는 것, 그 “길고 지루하고 무르고 질”(「목젖의 시절」)긴 시간을 희음은 “목소리도 신음도 없이” 잘 견뎌내었다. 앙상한 슬픔과 건조한 어둠을 건너 시인은 마침내 “깨어난 작은 자”(「여름 벽」)로서 벽을 향해 “빌어먹을”이라고 외칠 수 있게 되었다. 그 속삭임이 점점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자라나고 “터져 나온 것이 울음이 아니라 물음일 때”, ‘이름’은 비로소 태어난다. ‘않다’와 ‘아니다’에 기대어서만 간신히 설명할 수 있었던 세계는 이제 얼굴 없던 ‘타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나’의 통증과 치욕의 원천 역시 한결 명료해진다.

말과 침과 오줌. 이 세 가지는 시인이 세상을 더럽히는 동시에 정화하는 자기 방출의 질료이며, 타자와의 소통과 사랑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행해져 온 무례와 폭력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기도 하다. 시인은 더 이상 쐐기풀로 오빠들의 조끼를 뜨며 침묵하는 누이가 아니다. 밤새 파도 속에서 돌림노래를 부르는 사이렌이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는 세헤라자데가 되었다. ‘나’는 어느새 ‘우리’가 되고, 「치마와 치마와 치마와 치마」에 이르러 “치마들은 마주 본다/들추지 않고 입속 깊이까지 줄 서 있는/말들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그 마주 봄은 “우리는 우리로 울렁거리고/우리는 우리로 더 깊이 희다”(「사양」)고 말하는 시인을 “다시 태어나는 말들의 붉은 입속”으로 데려갈 것이다. 세계와의 키스는 그렇게 느리지만 확실하게 계속될 것이다.
-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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