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하나님도 가까이하시고(4:8) 하나님이 그를 자신의 벗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써 광야의 시험을 이기셨듯이, 야고보 역시 독자들이 이 광야에서 세상을 향한 허탄한 자랑과 재물을 향한 헛된 기대, 권력이 주는 그릇된 만족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만족과 기쁨을 맛보도록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본서의 제목을 『시험을 만나거든: 현실과 씨름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야고보의 지혜』라고 잡았다. ‘시험’과 ‘지혜’를 야고보서의 핵심 단어로 보았기 때문이다. 시험은 어쩌다 엄습하는(‘당하는’) 시련만은 아니고, 우리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선택이 요구되는 모든 삶의 조건들에서 맞닥뜨린다(‘만난다’). 그 선택은 늘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하며 우리의 욕망이 투사되어 이루어진다. 시험과 선택의 장은 오늘 우리가 두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고 일상이다. 죄로 인해 망가지고 뒤틀어진 역사이다. 그 현실은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물적인 공간의 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엄연한 영적 현실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과 사탄이 있고, 그들이 형성하는 각각의 질서와 삶의 원리가 있다. 부디 본서가 시험을 통해 우리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까지 그분의 손길(‘지혜’)을 의지하는 광야를 순례하는 데 보탬이 되는 소박한 연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 서문 중에서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야고보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문구가 ‘모든 기쁨’(Pa/san cara.n, 파산 카란)이다. 그것은 ‘순전한’ 기쁨이고 ‘전적인’ 기쁨이다. 야고보서의 가장 중심 주제는 “시험”이다. 기쁜 소식인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자가 가장 먼저 강조하는 메시지가 “순전히 기뻐하라”, “충만하게 기뻐하라”인 것은 야고보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를 미리 내다보게 하는 강력한 방식이다. 이 기쁨은 감정보다는 존재 상태이다. 이것은 행복과도 다르다. 기쁨이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기막힌 현실을 당하여 인간적으로는 고통스럽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깊은 탄식을 쏟아 내기도 하겠지만, 그런 중에도 소망의 근거를 분명히 가진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존재 상태를 말한다.
--- p.40
우리는 시험을 받을 때 늘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것만 채워지면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부족한 것, 가장 부족한 것, 그래서 가장 먼저 채워져야 하는 것은 ‘지혜’(sofi,a, 소피아)이다. 시험을 잘 인내할 때 이를 수 있는 ‘부족함 없는 사람’은 바로 ‘지혜로운 사람’을 가리킨다. 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의 안목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온전히 인내할 수 있다. 무엇이 지혜인가? ‘지혜’는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그래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의 때를 기다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이다. 지혜를 구하는 기도는 곧 하나님의 지혜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맡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당장에 이해하지 못해도, 때로는 수긍할 수 없어도, 내 현실이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양립할 수 없듯이 보이더라도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신비와 더불어, 역설과 더불어, 질문과 더불어 살겠다고 결심하는 태도가 지혜이다.
--- p.52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의 가장 뚜렷한 변화는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의 변화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더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을 사랑하니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진다. 우리는 도무지 진리의 말씀을 받을 수 없는 길가의 심령이었는데 주께서 친히 우리 안에 말씀을 심어 주셨다. 이제 우리는 그 복음의 말씀을 성도 각자가 ‘받아야’ 한다. 말씀을 지적인 유희나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소유’는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정보’는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역사하도록 늘 우리의 자리를 성령께 내어 드려야 한다. 그래서 좀 더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고, 더 많은 삶의 신비를 누려야 한다. 인생이 우리의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더 큰 섭리에 자 신을 맡기고, 끝까지 한눈팔지 않으며 이 시험을 잘 이겨 내자.
--- p.123~124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한 삶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야고보는 규칙적으로 기도한다든지, 예배를 잘 드린다든지, 전도를 잘한다든지, 성경을 많이 읽는다든지 등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께’ 잘하는 것을 경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우리와 이웃의 관계에서 경건이 증명되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세상의 관계에서 경건이 증명된다고 한다. 하나는 내적인 경건을,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경건을 말한다. 하나는 사회적 경건을, 다른 하나는 개인적 경건을 말한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절름발이 신앙이고 치우친 신앙이 된다.
--- p.135
야고보는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그’ 믿음이 구원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믿음과 행함을 분리할 수 있다는 뜻이 되어 버린다. 야고보에게 둘은 구분할 수 있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그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처음부터 믿음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지만, 전인격적인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영생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 날에 그간 반응하지 않은 사람은 핑계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전인격적으로 우리에게 호소하셨기 때문이다.
--- p.185~186
야고보의 공동체가 직면한 광야 현실에서 성령과 지혜의 역할은 더욱 중요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와 지혜의 열매 사이의 상관관계가 보여 주는 함의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지혜의 영이시다. 시험을 이기게 하는 영이시다. 의의 열매, 화평의 열매는 분명 야고보서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두 가지 시험인 ‘혀’의 사용과 ‘부’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사람은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자랑하거나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말하고 성령을 따라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차별하지 않고 긍휼의 마음으로 대할 것이다. 그런 지혜의 삶을 통해 성령이 그 공동체 안에 의와 화평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다.
--- p.265
세상의 지혜는 우리를 교만하게 하지만, 하늘의 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겸손하게 해 준다. 하늘의 지혜는 겸손한 자가 되어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해 준다. 하나님은 그런 자녀들에게 이전에 누렸던 은혜보다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 문맥상 여기 ‘큰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을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이 시기와 그 사모(갈망)함이 날로 커진다는 뜻이다. 간음하는 여인들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여 기다려 주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신부로 삼아 주신 은혜가 이제 이에 화답해 하늘의 지혜로 주님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우리의 믿음의 반응으로 인해 더 커질 것이다.
--- p.294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1:18). 하나님은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심어 두셨다(1:21). 그렇다면 그 말씀을 따라 주의 뜻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될 때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 그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2:5)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영원히 쇠하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인데(1:12),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생명을 위하여 생명의 하나님을 외면해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여기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까지 ‘주의 뜻이면’이라고 가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반드시 산다고 전제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설령 살지 않고 죽을지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것까지가 믿음이다.
--- p.327
‘길이 참는다’라는 말은 용감하게 고통을 감내한다는 말보다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성급하게 보복하지 않고 자제한다는 뜻이다. 되갚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롬2:4; 벧전 3:20; 갈 5:22). 또 서둘러 그 고통의 의미를 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내게 닥친 고통이 하나님의 무능이나 사랑 없음의 결과라고 쉽게 판단하지 말고, 또 내 죄의 결과라고도 말하지 말고, 심지어 나를 연단시키시기 위한 손길이라고도 너무 빨리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고, 힘들다고 말하고,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있고, 하나님은 결코 이 일에 무기력한 분이 아니시라고 고백하라는 뜻이다. 이 일을 통해서도 참 예술가이신 하나님이 나를 탁월한 걸작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 지켜보는 용기를 갖는 것이 ‘길이 참음’의 의미이다.
--- p.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