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의 강설: 이러한 유와 무의 관계를 “마치 등나무가 나무를 의지하는 것과 같다.”라고 한 점은 절묘한 비유다. “나무가 넘어지고 등나무가 말라버릴 때는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에 “서로 따르느니라.”라고 한 말도 존재의 본질과 실상을 잘 밝힌 말이다. 실로 사람의 삶과 세상 만물 모든 존재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도 없다.”라는 인연생기(因緣生起)라는 절대 진리인 연기법에 근거하고 있다. 비록 세존의 깨달음이라 하더라도 이 진리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대혜 선사는 여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참선을 수행의 제일 덕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의 어떤 선사도 이처럼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그 이치로나 이론으로나 명확하게 체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잊어서는 안 된다.---p.20-21
강설: 공연히 그와 같은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그 마음을 불법문중으로 돌이켜 지혜의 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번뇌의 때를 깨끗이 씻으라는 가르침이다. 특히 지금 죄라고 여기는 그 생각을 일도양단해서 더 이상 세속에서 살아온 일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다고 하였다. 그렇다. 그동안 살아온 그 어떤 영광도 오욕도 지금 무엇이 있단 말인가? 모두가 허망한 환영일 뿐이다.---p.42
강설: 불교가 인류에게 끼친 수많은 영향 가운데 내일과 내생을 위해서 꿈을 꾸게 하고 서원을 세워서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살게 하는 점이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몰록 생사에서 벗어나 최상의 깨달음을 증득한다는 말은, 불교의 깨달음은 역사적으로 볼 때 경전 한 구절이나 조사의 말 한마디에 문득 진리를 깨닫고 도를 이루는 일이 허다하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p.45-46
강설: 인간은 누구나 3독과 8만 4천 번뇌와 무명과 6식(六識)의 굴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 자체가 그대로 부처로서의 삶이다. 그 삶을 떠나서 달리 부처의 삶은 없다. 선재동자는 진실한 믿음 하나가 갖춰짐으로써 비로소 출발하기 이전의 궁극적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곧 사람의 삶 그대로가 부처의 삶이라는 내용이다.---p.52
강설: 총명한 사람들의 병이란 자신을 향해 참구하지 않고 자신 밖을 향해서 깨달음을 구하는 점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자신을 향해서 참구하도록 하기 위해서 큰 방편을 들었다. 그것이 화두라는 것이다. 선불교 초기에는 없었던 방법이지만, 근기가 날로 하열해지면서 그 하열한 근기를 무르익고 성숙하게 하도록 만든 것이 간화선법(看話禪法)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선불교의 전통이라고 하는 선법(禪法)은 곧 간화선법이다.
강설: “깨달아 증득하려는 마음이 앞에 놓여 있어서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짓기 때문이다.”라는 점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여 그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물론 깨달아야 하지만 깨닫는 나와 깨닫는 대상은 둘이 아니다. 이 둘이 아닌 것을 둘로 나눠놓고 깨달으려고 하니 남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또한 불교 공부를 깊이 있게 하려는 사람들의 큰 문제점이다. 깨달으려는 마음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깨닫지 못한다.---p.66
본문: 방 거사(龐居士)가 말씀하였습니다. “오직 모든 있는 것을 비우기를 원할지언정 간절히 바라노니 모든 없는 것을 채우지 마라.”라고 하였습니다. 오로지 이 두 구절의 뜻만 요달(了達)한다면 일생의 참선 공부의 일은 다 마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어떤 한 종류의 머리 깎은 외도는 자신의 눈도 밝지 못하면서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죽은 고슴도치처럼 쉬어가고 쉬어가라.”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만약 이처럼 쉬고 또 쉰다면 1천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더라도 쉬지 못하고 더욱더 마음을 답답하게 할 뿐입니다.---p.78
강설: 당시 묵조선의 선사들이 공부 방법으로서 “인연을 따라 마음에 지니어 잊지 말 것.”과 또 “생각을 잊어버리고 묵묵히 비추라.”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대혜 선사는 존재의 실상을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서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다시 말하면 묵조선의 공부 방법은 크게 깨닫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간화선에서는 화두 일념의 관문을 지나 크게 깨닫는 계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점이 가장 큰 다른 점이다. 조사가 제시한 깨달음의 방편을 잃어버리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잘못 가르쳐 사람들의 일생을 망쳐놓았다고 꾸짖는 말씀이다.---p.80-81
강설: 만약 고요한 데서만 공부가 되고 시끄러운 데서는 공부가 안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공부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쓸모없는 공부이다. 이 편지의 큰 뜻은 시끄러운 것과 고요한 것을 하나로 여겨 활구(活句)를 깊이 참구하라는 것이다.---p.93
강설: 참선 공부의 요체는 먼저 밖의 인연을 다 쉬어서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좌선하면서 안으로는 여행 갈 생각, 도반 생각, 신도 생각, 해제비에 대한 생각, 한자리를 얻어 볼 생각, 노후 생각, 토굴 생각 등등 온갖 생각에 이끌리고 있으면 그것은 망상을 피우고 있는 것이지, 참선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이 다 끊어지고 마음이 꽉 막혀서 마치 담벼락과 같아야 한다. 그러한 마음가짐이 비록 도(道)는 아니지만, 도에 들어가는 훌륭한 방편적인 길은 되기 때문에 옛사람들이 권하고 있다. 설사 도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와 같은 삶의 자세는 참선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모습이다.---p.101
강설: “맑은 것으로써 맑은 데 들어가 합하는 것〔湛入合湛〕”이란 제7식과 제8식까지 철저히 맑고 텅 비어서 그 텅 빈 자리가 최상의 경지인 줄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 또한 구경(究竟, 최종적인)의 경지는 아니다.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서 온 힘을 다해 보살행으로 인생을 연소시킬 줄 아는 삶이라야 된다.---p.102
본문: 요즘 도가(道家)의 사람들은 온전히 망상심(妄想心)으로 해〔日〕의 정기와 달〔月〕의 정기를 염상(念想)하며, 안개를 마시고 맑은 기운을 삼켜서 이 몸을 세상에 오래 머물게 하기도 하며〔장수〕, 춥고 더움의 핍박을 받지 않는데, 하물며 이 마음과 생각을 돌이켜서 온전히 반야 가운데 있는 것이겠습니까.---p.112
본문: 만약 반야에 깊이 들어가면 저 곳(세속)의 일은 굳이 배척하지 않아도 모든 마구니와 외도들은 자연히 항복할 것입니다. “생소한 것(반야)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세속사)은 생소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공부하는 일에 패병(?柄, 칼자루, 주도권)을 잡으면 점점 힘이 덜 들게 되는데, 문득 이것이 힘을 얻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p.116
본문: “(無를 참구하는 방법은) 있다. 없다.”로 이해하지 말며, 도리가 있다고 이해하지 말며, 의식으로 사량하고 헤아리지도 말며, 눈썹을 치켜들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 집중〔?根〕하지도 말며, 언어의 길에서 활계(活計)를 짓지도 말며, 일 없이 껍질 속에 숨어 있지도 말며, 화두를 드는 곳을 향해서 알려고도 하지 말며, 문자를 이끌어 증명하지도 마십시오. 다만, 12시 행·주·좌·와 속에서 순간순간 제시(提?)하고 참구해 보십시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르되, 없다.”라고 한 것은 일상생활을 떠나지 말고 시험 삼아 이처럼 공부를 지어보면 날이 가고 달이 감에 곧 스스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일개 군(郡)의 천 리의 일이 모두 서로 방해되지 않을 것입니다.---p.170
본문: 확철하게 크게 깨달으면 가슴 속이 환하게 밝은 것이 마치 백천 개의 태양이 뜬 것과 같습니다. 시방세계를 한순간에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털끝만치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구경의 경지와 합일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능히 이와 같이 된다면 어찌 유독 생사의 길에서 힘을 얻는 것뿐이겠습니까. 훗날 재차 국가의 중요한 책임〔鈞軸〕을 맡아서 군주(君主)를 요순(堯舜)보다도 더 높이 올려놓는 일도 마치 자신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쉬울 것입니다.---p.177
강설: 사람은 본래부터 누구나 위대한 인간 부처며, 부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소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백정도 그대로 부처라고 선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견해가 참다운 불교의 견해요, 만약 이 원리와 원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견해는 삿된 마구니의 견해다. 불교의 견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불교는 이처럼 쉽다. 쓸데없는 방편 불교가 어렵고 힘이 든다. 이 얼마나 통쾌한가.---p.181
참선하는 납자가 불법에 대한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고 선원에 앉아 있는 것은 그야말로 사상누각(砂上樓閣)을 짓는 일이다. 만약 돈과 명예가 더 소중하여 해제비나 토굴 주지 노릇 등에 혈안이 되어 있다면 더이상 불교나 참선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세속의 일이요, 불법과는 십만 팔천 리 떨어진 일이다. 불법 공부는 생소한 것은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은 생소하게 하는 일이다.---p.230
불교 공부는 그와 같은 궁극적 차원의 참사람에 접촉하여 불생불멸인 해탈의 삶을 누리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혹은 견성성불이라고도 한다. 한번 궁극적 차원에 접촉〔見性〕하게 되면 그 다음은 그 사람의 모든 역사적 현실의 삶이 궁극적 차원의 삶이 된다. 이미 본래로 궁극적 차원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스스로 그것을 모를 뿐이다. 모든 사람이 본래 저절로 담연(湛然)한 삶이다. 파도는 애를 쓰지 않아도 본래 물이다. 사람은 이미 부처였으며 이미 원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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