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 미친놈아!”
갑자기 엄마가 소리를 꿱꿱 내질렀다. 미친 것처럼 구는 엄마와 차분한 아빠 목소리가 대조적이어서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미린이는 또 누구지? 새로 붙은 여자? 그런데 죽었다고?
엄마가 지르는 비명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아빠가 내버려두고 있는 것 같아서 나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안방으로 뛰어들다가, 약간 열린 문 앞에서 멈췄다. 문틈으로 엄마와 아빠가 보였다.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빠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애는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빠가 꿇은 무릎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알음아, 나와 봐.”
한참 뒤 방에서 나가 보니 소파 위에 그 애, 다움이가 있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미린이라는 여자의 어린 아들.
(/ p.16)
“나 무서우니까 옆에 있어주기나 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소희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세상에, 주문이라니. 마법 세상도 아니고 샤먼이 있는 시대도 아니고 도대체 왜 중학생 애들은 이런 걸 믿는 걸까? 열다섯쯤 되면 다 컸다고 하면서도 어이없는 귀신 소문들을 심심찮게 입에 올렸고, 게다가 반 이상은 믿었다. 마치 산타클로스를 믿는 어린애들처럼. 다들 현실을 지독하게 겪어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나처럼 아빠가 어디서 어린애를 데려와 맡기는 일이 생겨야 허황된 뜬소문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다들 배가 불렀다니까. 말로만 자신이 불행하다고 떠들지 사실은 불행한 게 뭔지도 모르면서!
(/ pp.18~19)
“계약자?”
나는 겨우 기억해낸 단어를 내뱉었다. 상대가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끄는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지고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물어야 했다. 묻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해야 할까. 눈앞에 나타난 괴이한 형상을 눈으로 좇으면서 가만히 있는 것은 힘들었다. 두려움이든 호기심이든 괴물은 나를 유혹하며 잡아끌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괴물은 정말 나를 유혹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괴물이 이런 말을 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았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괴물이 마치 내 바람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는 점이다. 악몽 속에서 잠시 조우했던 것으로는 들킬 수 없는 속내다.
계약은 시작되었다.
괴물이 다시 말했다. 귀로 들리지는 않지만, 들리는 목소리로. 내 몸이 동굴이라도 되는 양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계약. 계약. 계약. 또 계약이다.
문득 소희와 빈집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소희는 교실에서 이상한 주문을 외운 것처럼 그때도 중얼거렸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귀신과 계약을 맺기 위해서 그랬다. 그래, 이건 소희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맺은 계약이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잘못 아셨어요. 제가 아니에요.”
귀신인지 괴물인지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자세히 해명할 수도 있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회고 운명이다. 정말 계약이라는 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지 않았으나, 정작 상대 계약자는 나에게 찾아왔다. 소희가 아니라.
왜인지는 모르나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시시껄렁한 소원 따위를 비는 소희는 이런 횡재를 할 자격이 없다. 계약자도 그걸 알기에 나에게 온 게 분명하다.
“좋아요. 그럼 저는 무엇을 드리면 되죠?”
소희가 한쪽 귀가 따가울 정도로 떠들던 계약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수다를 흘려들은 일을 후회하게 될 줄이야. 만화와 영화에서는 비슷한 상황에서 대부분 치명적인 것을 요구했다. 수명을 조금씩 빼앗아간다든가. 소중한 것을 내어주어야 한다거나. 나는 순순히 목숨 따위를 내어줄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아무것도.
그걸로 끝이었다. 계약자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 pp.51~53)
내가 왜 그랬을까. 나와 율 사이에 소희가 있다는 걸 왜 간과했을까.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라? 계약자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늘 일은 다른 애들 입으로 분명히 전해진다. 소희에게 고백해야 한다. 약간의 거짓말을 덧붙여서.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났다거나 그런 선의의 거짓말.
난 그저 피겨가 구경하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피겨였어.
진실을 되뇌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은 피겨가 아니라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