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태를 불러온 쇠퇴 과정에 사실 대부분의 서구 개신교도 동참했으며, 그 과정은 다음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째, 19세기 중엽 이후로 성경 비평, 진화론,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과학적 실용주의 등이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의 초자연주의의 많은 부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구원과 교회에 대한 전체 메시지가 흐려졌고, 기독교 전통의 특징이었던 명료한 교리가 점점 더 부당하고 설득력 없게 느껴졌다. 둘째, 그러다 20세기 중엽 이후로 일부 교사들이 성경의 내러티브들을 개작하여 역사적 사실성(우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몸의 부활, 승천과 같은 기적의 이야기들)을 부인했고, 그런 부분들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체험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일축했다. 성경의 율법 조항들도 그들은 현존하는 최고 개념의 사회 정의에 따르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아울러 그들은 이렇게 영적 의미를 걷어내는 것만이 성경 해석의 적절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퍼뜨렸다. 뻔히 예상되다시피 그 결과 기독교는 교회를 바탕으로 역사적 연속성을 지니는 하나의 신비주의로 전락했고,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 감정과 자선을 행하려는 태도만 남게 되었다. 시공 속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은 여기에 전혀 필요가 없다. 설령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하지 않았고 죄로부터 구원받는 복음이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입증된다 해도, 그런 기독교는 얼마든지 미래에까지 지속될 것 같다.---1. 믿음에 진지하라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연합의 한 표현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인생의 이상적 기준에 비추어, 그 사랑을 책임감 있게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무너뜨린다. 자녀, 배우자, 친구, 불우한 이웃, 학대당하는 집단 등 남을 사랑하는 일을 무엇이든 상대방이 달라는 대로 주고 상대방이 선택하는 대로 용납한다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기독교의 기준에 못 미치는 서글픈 착각이다. 물론 사랑은 준다. 하지만 하나님께 합당한 행동의 선(線)을 지키지 않고 무조건 준다면 이는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이 아니다. 절제, 정서적 성숙, 용기, 겸손, 인내, 진실성, 신뢰성, 정결함, 거룩함 등 전반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간접적으로라도 독려하고 그쪽으로 돕지 않으면서, 무조건 주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도덕적 둔감성과 무관심은 기독교적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을 말살한다.---3. 그리스도인의 연합에 진지하라
하나님의 계획은 하늘의 모든 권세에게 자신의 어마어마한 지혜와 선하심을 드러내시는 것인데, 이 계획에서 교회가 중심을 차지한다(참조 엡 3:8-11).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구원하시는 복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즉, 찬양받기 합당하신 그분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것)이 곧 우리의 소명이다. 이 소명을 다하려 할 때 우리의 사고에서도 교회가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중심의 소명은 교회 중심의 사고방식을 요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부분에서 정말 기준 미달이라 할 수밖에 없다.---5. 교회에 진지하라
예수께서 이 두 의식을 명하셨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것이 그분께 중요했다는 뜻이다. 분명히 그분은 이 둘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과 지속을 대변하는 일로 보셨다. 곧 살펴보겠지만 그분이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세례와 성만찬은 둘 다 성령과 믿음을 통한 그분 자신과의 독특한 결속을 가리키고 예찬하고 굳건히 한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의 생명과 이어주는 신자의 탯줄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시작된 그 생명을 우리는 장차 온전히 누리게 된다. 부활하여 통치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구속자, 우리의 주권적 주님, 친구와 형제, 도움과 소망이시다. 그분의 아버지는 은혜와 입양으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되셨다. 이 두 분과의 연합과 교류―의지적이고 체험적인 교제―야말로 참된 기독교의 본질인데,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의식이 의미하고 상징하고 보증하는 것이 바로 그 초자연적 삶이다. 이 삶의 기초는 하나님의 귀한 약속들과 불변의 사랑이며, 우리 안에 그 삶을 지속시켜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7. 세례에 진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