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의 중심내용은 바울이 정리한 메시지와 동일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세계선교’라고 결론내릴 수 있겠습니다.
--- p.32
마태복음에서 신약성경 시작하는 첫마디로 ‘바로 그 왕, 그 다윗의 자손이 오셨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그가 오시는 이유, 바로 땅의 모든 족속을 복 받도록 하기 위해서 땅의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 p.40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한 싹은 다윗이고, 그 뿌리에서 나는 한 가지가 곧 예수이시며, 여기 예수님을 상징하는 한 ‘가지’와 ‘나사렛 예수’라 불리시는 ‘나사렛’이 의미적으로뿐만 아니라, 언어 음가적으로 연결되면서 이사야 11장의 메시아와 그 구원에 대한 예언이 예수를 가리키는 것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 p.55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사역 장소와 관련된 선교적 메시지는 공생애 시작 때뿐만 아니라, 이후 예수님의 사역 속에 여러 차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대놓고 이방 선교를 하셨다고 말씀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이방 선교에 대한 경험과 훈련을 시키셔야 했습니다.
--- p.71
사실 예수님의 사역 현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처음부터 차별하지 않고,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아올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기를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만 사역한 것처럼 잘못 주입되어 있으니 이제 이 이미지를 수정해야 하겠습니다.
--- p.100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결국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아니 ‘모든 열방’ 중에 선포되고 은혜로 임하고 누려지게 되는 참된 복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당시의 왜곡된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잘못된 이스라엘의 종족 우월의식을 깨고, 열방과 세계 만민을 향하는 진짜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 p.117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의 짧은 시간과 이스라엘 지역에 국한 된 사역이었지만 당시 국한된 지역에만 복음을 전할 목적이 아니라, 복음사역과 제자훈련을 통해 이 원리를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대에서 이 사역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하신 제자들을 통해 연쇄적으로 계속해서 모든 종족들이 복음을 듣고 또 전하는 큰 비전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의 전체 시간과 공간에 관한 관점이자 전략이셨던 것입니다.
--- p.123
지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귀 타고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해야 할 만민, 모든 열방과 모든 민족들까지 구원하시기 위해 그 속죄제사의 제물로서 십자가에 자신을 드리기 위해 오신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대속의 중심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 성전이 이 꼴이 되었으니, 예수님의 진노는 참으로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 p.143
복음서의 각 위임령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이 선교의 위임령은 단순한 지시나 명령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위임은 ‘권위와 책임’을 함께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명령+약속’의 형태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족속으로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선교의 사명을 ‘명령’하시면서, 그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를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 p.168
처음에 복음이 유대주의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가 헬라, 라틴, 게르만, 앵글로색슨, 그리고 세계 모든 문화 속으로 점차 퍼져나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장애가 되었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문화’였습니다. 모든 문화는 공유할 수 있는 유사성이 있는 반면, 차이점도 존재하는데, 이것이 복음 전하는 사람이 속한 문화와 복음 받는 사람이 속한 문화 간의 ‘문화적인 거리감’ 또는 ‘문화적 이질성’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185
사도행전의 핵심은 성령님께서 사도들과 초대교회 가운데 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 복음을 가지고 어떻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의 이스라엘 유대주의 문화를 넘어서, 유사문화권인 사마리아와 완전히 타문화권인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되게 하셨는지 보여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194
사도행전 10장 28절,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그것은 사도들이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접촉하고 교제하는 것을 율법을 어기는 행위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3년씩이나 받았고 예수님의 선교 위임령을 직접 받은 사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커녕,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조차 꺼려했던 것입니다.
--- p.221
성령께서 강권하심으로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 유사문화권선교를, 그리고 역시 빌립을 통해서 함족 에티오피아인 타문화권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제 쐐기를 박기라도 하시듯,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도인 베드로에게 환상이라는 비상한 방법을 통해 결국 당시 로마 세계의 주류 종족이었던 야벳족을 위한 선교를 직접 수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제 온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을 향한 복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 p.240
선교운동을 위해서 따로 세워진 사람들을 가리켜서 선교학적으로 우리가 ‘소달리티’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원래 안디옥 교회는 목양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소달리티의 반대 개념인 ‘모달리티’입니다.
--- p.254
바울이 쉼과 안식에 앞서 또는 그와 함께 행한 일은, 바로 오늘날로 말하자면 ‘선교 보고’를 한 것입니다. 적어도 바울이 보여준 안식년 시간의 중요한 목적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니 선교사도 쉬어야지, 온전히 안식해야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충분한 쉼과 안식, 재충전이 다음 사역을 위해서도, 오랫동안 충성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이 선교보고를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선교사로서의 소명에서 매우 중요한 한 영역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선교보고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선교사 자신을 통해 이방 가운데 행하신 그 일들을 ‘모두, 낱낱이’ 알게 하는 시간입니다.
--- p.278
이 더둘로가 바울의 선교를 가리켜 말한 전염병은 어떻습니까? 혼자 앓고 마는 병이 아니고 근처에 있는 사람을 다 전염시켜 다 똑같이 그 병에 걸리게 만드는 것이 전염병입니다. 예상대로 그는 최고 수준의 변호사답게 복음과 선교의 본질을 정확히 본 것입니다.
--- p.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