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이 별다른 작용을 하지 못함에도 피곤하면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서 박카스나 비타오백, 레드불, 커피 같은 걸 부어 넣는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뇌가 충족할 만큼의 카페인을 기어코 복용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가끔은 정신이 드는 것도 같다. 내일에 나를 잠깐 빌려오는 일. 시간을 거스르는 건 영 불가능하지만 이런 식으로 비꼬는 건 때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했다. 미래에 빚지고서 글을 적다 보면, 지금의 나도 과거의 내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때의 나를 동정하거나 괜찮다고, 다 그럴 수 있다고 토닥이거나 미화시키는 것 말고 좀 덜 안쓰러운 거. 울어주거나 탓하는 거 말고 좀 따듯한 거. 제발. 따지고 보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는 다 서로에게 일말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이고.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내가 되는 거라면 나는 갚을 게 많은 사람인 셈이다. 이자를 달 수 있다면 갚는 쪽보다 받는 쪽에 있고 싶다.
--- 「빚」 중에서
소소는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몇 달간 서로를 관찰한 결과 도출된 결론이다. 틈만 나면 좁은 곳으로, 아니 틈을 내서라도 좁은 곳으로 기어들어 간다. 저긴 어떻게 들어가 있는 거야? 싶을 만큼 불편한 자세로 누워서 잠을 자기도 한다. 구석진 곳을 좋아하는 성정은 나를 좀 닮았다. 어디든 파고들어 드러눕는 집요함도.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애를 보면서 생각한다. 저 애는 나의 어떤 면을 발견했을까. 배변패드에 응아를 하면 맛있는 간식을 주는 애, 잘 때 시끄러운 소릴 내는 애, 뜨거운 손을 가진 애, 가끔 혼자 우는 애..
어떤 것도 나를 대표할 순 없지만 저런 게 모여서 결국엔 내가 된단 사실,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서운할 거 없다. 보통의 인간이란 대충 그렇게 생겨먹었다. 그러므로 나의 일부를 들키는 일은 낯간지러울 수밖에 없다. 자꾸 들키다 보면 내가 변변찮은 보통의 인간이란 걸 실토해야 할 것만 같아서.
스스로 별거 아닌 인간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어떤 것은 시작된다. 생을 조명하는 다른 시야가 하나 더 생긴다. 눈을 뜨고 나서야 그간 감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별안간에 들이닥친 수치심이 한동안 주변을 맴돌면서 소란하게 군다. 더없이 겸손해지는 덕에 좀체 멀쩡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바야흐로 손해 보는 삶이 시작된다. 수치심도 모르는 놈. 그런 말을 달고 살기도 한다. 삶의 형태를 더이상 외면할 수 없으므로, 응당 짊어지기로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자꾸만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나의 못된 버릇. 우린 잘 구겨지는 성질을 가졌다.
--- 「잘 구겨지는 성질」 중에서
일말의 걱정없이 기뻐해본 적이 있을까. 가끔 자문한다. 자문하는 이유는 어떤 기쁜일 앞에서도 맘껏 기뻐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쁨은 온전한 것일 수 없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은 응당 온전한 것을 갈망하기 마련이라, 나는 때때로 터무니없는 이상적 기쁨 같은 걸 상상하곤 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 이상적 기쁨이란 이별 없는 사랑, 고통 없는 성장, 해가 뜨지 않는 밤, 그치지 않는 비, 책임감 없는 섹스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언가가 결핍되어야만 이상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 「이상적 기쁨」 중에서
누군가는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면 공항에 간다던데, B에겐 휴게소가 꼭 그런 장소인 모양이었다. 휴게소의 전경을 상상한다. 주차된 차들과 몇 대의 관광버스, 들뜬 사람들과 주유소…, 특히 휴게소에서만 먹을 수 있는 먹거리 같은 거. 이십 대 후반, 자주 출장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한 번 지방에 내려가면, 내려가는 김에 여행 삼아 주변 도시 몇 개를 경유하고 오던 때. 한곳에 정박하지 못하고 호숫가 나무두치처럼 하염없이 떠다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몇 백 킬로미터의 장거리 운전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휴게소에 들를 수밖에 없다. 화장실도 가야하고, 기름도 넣어야 한다. 허기도 달래줘야 하고, 피곤할 땐 좀 쉬어야 한다.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거쳐 가는 곳이기 때문에 책임감이나 무언 갈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다. 좀 어슬렁대다가 달달한 냄새에 끌려 충동적으로 소떡소떡 같은 걸 사 먹기도 하는 것이다. 내게 있어 휴게소는 그런 곳이었다. 가볍게 들렀다가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곳. 목적지를 목전에 두고 ‘이제 거의 다 왔다!’ 같은 느낌을 만끽할 수 있는. 이건 도달한 것과는 또 다른 만족감이다.
--- 「하늘 휴게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