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 있는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 스크랜튼과 정동병원 - ‘스크랜튼’
스크랜튼은 1888년부터 일반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서대문 애오개, 남대문 상동, 동대문 지역에 시약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중심 정동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이 거주하는 변두리로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1890년에는 남대문 지역에 남대문 시약소를 신설하고 맥길 의사와 함께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그는 선교부에 “민중이 있는 곳에 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건의를 하여 1894년 정동병원을 아예 상동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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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도깨비’, 메어리 스크랜튼과 이화학당
메어리 스크랜튼은 한국 감리교 여성교육에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나이가 많음에도 대단한 열정을 가진 한국 여성교육의 개척자이며, 열정적인 복음전도자였다. 75세까지 현장에서 일한 그녀는 1909년 10월 8일 한국에서 소천해 양화진에 묻혔다.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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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과격한 선동가, 독립운동 수감자들에게 고약까지 넣어주다 - ‘스코필드’
1919년 11월에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이 일어나 회장 김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이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때에도 스코필드는 직접 그곳을 방문하여 성경 말씀을 전하며, 고문당한 이들에게 미국제 고약을 넣어 주는 등 그들을 위로하였다. 감히 다른 선교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용맹스런 행동이었다. 일본에 의해 “가장 과격한 선동가”로 낙인찍힌 스코필드는 1920년 강제로 출국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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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과 교파의 경계를 무너뜨린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 - ‘하디’
맥컬리는 하디에게 “효과적인 기도를 위한 세 가지 필수 요소들”에 관한 세 번의 강연을 부탁했다. 하지만 하디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자신이 무엇인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자신이 선택한 성경본문에서 말하는 신앙이 자신에게 없었고,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도회를 준비하던 하디는 자신이 말씀과 깊이 만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그리고 기도회를 인도하는 내내 울면서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공격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통회했다. 이 기도회를 통해 그는 백인으로서 갖는 인종적 우월감, 의사로서의 신분적 교만함, 성령충만이 없이 해 온 사역 등을 고백했다. 이는 하디 개인의 회개와 통회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성령의 임재가 임하는 통로를 만들어 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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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들의 탄식, “어머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 ‘쉐핑’
그녀가 남긴 전 재산은 보리쌀 두 홉과 한 끼 식사 값도 안 되는 7전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맡에는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글귀가 남아 있었다. 예수를 믿는 이유는 성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기 위한 것임을 죽을 때까지 강조했던 것이다. 쉐핑의 죽음에 양림천에 생활 근거를 두고 있던 거지들이 가장 충격을 받았다. 쉐핑은 항상 생활비를 받으면 그 길로 곧장 양림천으로 달려가 거지들을 인솔해 목욕탕으로 가서, 깨끗하게 목욕을 시킨 후 옷 가게로 안내해 남루하고 더러웠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히고, 마지막으로 음식점으로 안내해 쇠고기를 먹였기 때문이다. 양림천에 사는 거지들에게 쉐핑은 자신들의 어미니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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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이고 영적인 맥은 선교사나 현지인이나 상관없이 조용히 대를 이어간 것이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낳고 영적 거장은 또다른 영적 후예를 만들어 낸다. 오웬과 유진 벨은 살인자요 양조장을 운영하던 김윤수를 회개시켰고, 그 김윤수가 예수를 믿고 광주에서 최흥종에게 복음을 권면했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 선교지부를 세우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최흥종은 오웬과 포사이드의 삶과 신앙을 보고 나환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돌보면서 호남의 성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 본문 중에서